철원, 이름 석 자만으로도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흔적과 아스라한 옛 전설이 교차하는 듯한 묘한 울림을 주는 곳. 그곳, 강원도 철원의 깊은 품 안에 자리한 고석정은 오래전부터 제 마음 한켠에 아련한 그리움과 호기심으로 존재했습니다. 평생을 사진으로 찰나의 미학을 붙잡으려 애쓰고, 글로 인생의 깊이를 헤아리려 노력해왔지만, 어떤 풍경은 단순히 기록하는 것을 넘어선 영혼의 울림을 선사하곤 합니다. 고석정은 제게 바로 그러한 곳이었습니다.
저는 늘 수필이라는 형식 속에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카드뉴스라는 현대적인 매체를 통해 저의 사색과 지식을 공유하며 새로운 소통 방식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목표, 즉 '수필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과 '카드뉴스 제작 능력 향상'이라는 여정의 한가운데서 저는 문득, 자연의 원형적인 아름다움과 그 속에 깃든 시간을 마주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습니다. 거친 물줄기가 빚어낸 기암괴석과 그 속에 녹아든 역사의 흔적을 직접 더듬어 보고 싶은 마음. 한탄강의 거친 물길이 수만 년에 걸쳐 조각해낸 그 비경이 어떤 이야기들을 품고 있을지, 설레는 마음을 안고 가을의 문턱에서 철원 고석정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서울에서 출발한 지 두 시간 남짓,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점차 고요하고 드넓은 평야와 구불구불한 산등성이로 바뀌었고, 이윽고 이정표에 '고석정'이라는 글자가 나타났을 때, 제 심장은 기대감으로 크게 고동쳤습니다.
한탄강의 심장, 우뚝 솟은 고석바위, 그 영원한 침묵의 미학
고석정 입구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저를 맞이한 것은 탁 트인 드넓은 광장이었습니다. 잘 가꾸어진 조경과 주변의 웅장한 자연이 어우러져, 이곳이 심상치 않은 곳임을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광장을 가로질러 한탄강을 향하는 길은 완만한 경사로 이어져 있었고, 이내 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숨을 멎게 할 만큼 장엄했습니다. 에메랄드빛 맑은 물이 유유히 흐르는 한탄강, 그 한가운데에 10여 미터 높이의 거대한 화강암 바위가 마치 살아있는 듯 굳건히 서 있었습니다. 바로 고석정의 상징이자 한탄강의 심장이라 불리는 '고석바위'였습니다.
고석바위는 단순히 커다란 돌덩이가 아니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한탄강의 거친 물살과 바람,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깎이고 다듬어져 온 우주의 시간이 응축된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바위 표면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고, 곳곳에는 깊은 균열과 패인 자국들이 자연이 그려낸 추상화 같았습니다. 강물은 그 거대한 바위를 중심으로 부드럽게 감싸 흐르며,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힘찬 물살을 만들어내며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물결이 바위에 부딪히며 일으키는 잔잔한 포말,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강물 위로 드리워진 바위의 짙은 그림자는 시시각각 변하며 다채로운 색과 질감을 뽐냈습니다. 바위 틈새와 주변 강가에는 이름 모를 들풀과 작은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거친 자연의 품속에서도 싹을 우고 꽃을 피워내는 그 작은 생명력은 제게 큰 감동과 함께 왠지 모를 위로를 안겨주었습니다.
저는 강변을 따라 거닐며 고석바위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그 웅장함을 더욱 극대화했고, 강가에 앉아 올려다보는 고석바위는 마치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과 더불어 그 위엄에 압도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수천, 수만 년 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켜온 고석바위의 모습은 인간의 유한한 삶과 대비되어 묵묵한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저 거대한 바위가 이 강물과 함께 얼마나 많은 역사를 지켜봤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의 희로애락을 침묵 속에 품고 있었을까, 생각에 잠겼습니다. 사진작가로서 렌즈를 통해 그 순간의 빛과 그림자를 담아내려 노력했지만, 고석바위가 뿜어내는 아우라와 그 속에 담긴 시간의 깊이는 쉬이 카메라에 온전히 담기지 않는, 설명할 수 없는 경외감을 자아냈습니다. 이곳에서 자연은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형태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역사와 전설이 깃든 공간의 무게, 시간의 흔적을 걷다
고석정은 단순히 빼어난 경관만을 자랑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또한 오랜 역사와 흥미로운 전설들이 살아 숨 쉬는, 시간의 퇴적층이 두껍게 쌓인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조선 명종 때, 백성들의 편에 서서 탐관오리에 맞서 싸웠던 의적 임꺽정의 주 활동 무대였다는 이야기는 고석정, 특히 고석바위에 신비로움과 영웅적인 기운을 불어넣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임꺽정은 이 고석바위 안에 있는 자연동굴들을 은신처로 삼아 활동했다고 합니다. 바위 곳곳에 남아 있는 동굴의 흔적들을 보며, 거친 강바람을 맞으며 의기롭게 활보했을 임꺽정의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그는 굳건한 고석바위처럼, 흔들림 없는 신념으로 불의에 맞섰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억울함을 달래주고,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대항했던 그의 용기와 기개가 마치 강바람을 타고 제 귀에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그 시대의 민초들에게 임꺽정은 희망이자 저항의 상징이었을 터, 고석바위는 단순한 바위를 넘어, 정의를 갈망했던 사람들의 염원이 깃든 숭고한 존재로 다가왔습니다.
임꺽정 이야기 외에도, 고석정은 삼국시대 신라 진흥왕이 창건한 정자라는 유래를 가지고 있으며, 이 정자에서 당시의 풍류객들이 아름다운 경치를 즐겼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명장 남이가 이 지역에서 뛰어난 활 솜씨를 발휘하며 적들을 물리쳤다는 일화도 이곳의 험준한 지형과 계곡이 가진 전략적 중요성과 더불어 풍부한 스토리를 더합니다. 이처럼 고석정은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와 전설이 켜켜이 쌓여,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역사 교과서가 되어 주었습니다.
강가에 앉아 눈을 감고 있자니,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착각에 빠졌습니다. 진흥왕이 풍류를 즐기던 유려한 정경, 임꺽정이 관군을 피해 바위굴에 몸을 숨기던 긴박한 순간, 그리고 근현대사의 아픔 속에서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왔을 고석바위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습니다. 이 공간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풍경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역사가 교차하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땅이 품고 있는 시간의 흔적을 더듬으며, 저는 제가 현재 서 있는 이 자리의 무게를 새삼스레 느끼게 되었습니다. 수필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역사와 전설은 단순한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데 필요한 지혜의 원천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사유와 성찰의 강물, 그리고 나: 고석정에서 얻은 삶의 지혜
고석정에서 보낸 시간은 제게 자연의 경이로움과 역사의 깊이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안겨주었습니다. 굽이쳐 흐르는 한탄강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저는 인생 또한 이 강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거친 급류에 휩쓸리기도 하고, 때로는 잔잔하고 평온하게 흘러가기도 하며, 때로는 예측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히지만, 결국은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고석바위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굳건하게 제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시간을 견뎌내는 지혜가 우리 삶에 얼마나 필요한지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바위는 흐르는 강물에 끊임없이 침식되고 풍화되면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형태와 존재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변화 속에서도 본질을 지켜나가는 자연의 모습은 제 삶의 방향성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져주었습니다.
문득, 고석정 입구에 세워져 있던, 등에 커다란 칼을 걸머진 근육질의 사내 조형물이 떠올랐습니다. 그 조형물은 임꺽정의 강인한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었을 터입니다. 거친 세상에 맞서는 용기,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함, 그리고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듯했습니다. 수필가로서 '수필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저에게, 때로는 글이 막히고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좌절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또한, '카드뉴스 제작'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며 생소함과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임꺽정의 정신이 깃든 고석바위와 그를 형상화한 조형물은 제게 큰 울림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으며, 새로운 형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저의 창작 활동에 굳건한 고석바위처럼, 그리고 의로운 임꺽정처럼 흔들림 없는 자세로 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석정은 제게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삶의 이치를 깨닫게 해준 성찰의 공간이었습니다. 자연은 언제나 겸손하게, 그리고 묵묵히 우리에게 가장 근원적인 지혜를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풍경 너머에 숨겨진 이야기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던지는 삶의 질문들을 마주하며 저는 마음속 깊이 평온과 활력을 얻었습니다. 고석정을 떠나오는 길, 제 마음속에는 한탄강의 잔잔한 물결처럼 오래도록 이어지는 깊은 여운이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