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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에 부는 바람, 시간의 흔적을 만나다

by 현진코코 2025. 9. 21.

최남단 아주 작은 섬의 이미지
최남단 아주 작은 섬의 이미지

 

제주 모슬포항에서 남쪽으로 뱃길을 11km쯤 달려 약 30분, 대한민국 최남단 섬 마라도에 닿았습니다.

푸른 물결을 가르며 나아가는 쾌속선 위에서 바라본 수평선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이따금씩 바다 위를 스치는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드넓은 대자연 속으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도시의 번잡함과 일상의 무게가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렴풋이 멀리서 바라본 마라도는 마치 거대한 잔디밭 위에 놓인 작은 섬처럼 보였습니다.

 

높은 봉우리 하나 없이 평평하게 펼쳐진 지형은, 익숙한 제주의 오름과는 또 다른 낯설면서도 고즈넉한 매력을 풍겼습니다. 그 작고 긴 섬(동서 500m, 남북 1.2km)에 발을 딛는 순간, 저는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는 듯한 고요함과 동시에 거친 바다를 이겨낸 강인한 생명력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이곳 마라도는 단순히 지리적인 끝을 넘어, 삶의 지표와 자연의 웅장함이 교차하는 특별한 공간임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의 여정이지만, 긴 여운을 남길 것 같은 예감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그 벅차오름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자, 오랜 시간 이곳을 지켜온 자연과 삶에 대한 경외감이었습니다. 섬 특유의 짠 내음과 풀 내음이 섞인 바람이 저를 감싸 안으며, 이제 막 시작될 탐방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부풀렸습니다.

 

국토 최남단에서 마주한 상징의 땅


배에서 내려 섬에 발을 디디자마자, 가장 먼저 저를 맞이한 것은 ‘대한민국 최남단’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새겨진 기념비였습니다. 비석 주변에는 저마다 설레는 표정으로 기념 촬영을 하는 이들의 활기 넘치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대한민국 국토의 시작점이자 끝점에 서 있다는 감격과 뿌듯함을 느끼는 듯했습니다. 단순히 지리적인 경계를 의미하는 것을 넘어, 이곳은 우리 민족에게 자부심과 동시에 삶의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고 지난 시간을 겸허히 돌아보게 하는 특별한 공간임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기념비를 뒤로하고 섬의 해안선을 따라 걷기 시작하자, 드넓은 초원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비경이 끊임없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마라도는 최고점 39m의 낮은 지형을 가지고 있지만 , 그 평탄함 속에서 오히려 더 큰 스케일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든 마라도의 독특한 지형은 시야를 가리는 것 없이 드넓은 하늘과 바다를 온전히 드러내 주었고, 이는 마치 세상의 끝에 서 있는 듯한 웅장하고 신비로운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발밑으로 삐죽이 솟아난 풀들은 거친 해풍과 염분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이곳 마라도의 강인한 생명력을 증명하는 듯했습니다.

 

해안선을 따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각기 다른 모양의 기암괴석들이 발길을 붙잡았습니다. 오랜 시간 파도와 바람에 깎이고 다듬어진 바위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았고, 검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이 맞닿아 끝없이 이어지는 풍경은 절로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이 작은 섬은 면적이 0.3㎢에 불과하지만 , 그 안에는 대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소박한 삶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거친 날이면 파도가 해안 절벽을 쉼 없이 때리며 그 웅장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또 어떤 날에는 고요하고 푸른 물결이 섬을 감싸 안았습니다. 그 어떤 모습이든 마라도는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며, 우리에게 변치 않는 자연의 이치를 묵묵히 보여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등대와 성당, 삶의 이정표를 찾아서


마라도 탐방은 정해진 코스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이어졌습니다. 국토 최남단 기념비에서 등대로 향하는 길은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섬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걷는 동안, 탁 트인 시야 저 멀리 하얀 등대가 점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시야를 가리는 건물 하나 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 위, 홀로 우뚝 서 있는 하얀 마라도 등대는 푸른 바다와 대비되어 더욱 선명하고 고결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등대는 어둠 속을 항해하는 배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험난한 여정 속에서 방향을 제시해 주는 영원한 이정표처럼 느껴졌습니다. 등대 주변에서 잠시 멈춰 서서 망망대해를 바라보자, 고요하지만 쉼 없이 이어지는 파도 소리가 마치 심해의 심장 박동처럼 울려 퍼지는 듯했습니다.

 

등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아담하고 소박한 마라도 성당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단정하게 지어진 작은 성당은 거친 자연 속에서 묵묵히 신앙을 지켜온 이들의 고귀한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습니다. 성당 앞에 잠시 앉아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니, 바쁜 일상 속에서는 쉽게 가질 수 없었던 깊은 평온함이 찾아왔습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유난히도 고요하고 평화로웠으며, 멀리로는 제주 본섬의 한라산 웅장한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고립된 듯한 작은 섬에서 바라보는 또 다른 섬의 모습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소수의 주민들(2000년 기준 약 90명)의 삶의 터전을 스쳐 지나며, 저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작은 존재로 살아가는 이들의 강인함과 순박함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풍경과 마당에 걸려 있는 빨래, 길가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이곳이 외딴섬이 아닌, 생명이 살아 숨 쉬는 따뜻한 보금자리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들은 거친 바다와 맑은 바람 속에서 묵묵히 삶을 이어가며, 이 섬의 오랜 역사와 문화를 지켜온 진정한 파수꾼이었습니다. 거친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들의 삶의 태도는 제게 깊은 울림과 함께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듯했습니다. 마라도는 단순히 경치를 즐기는 곳이 아니라, 삶의 의미와 방향을 되짚어보는 사색의 공간이었습니다. 잠시 동안 도시의 번잡함을 잊고, 오로지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제 내면의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짧은 여정, 긴 여운을 남기다


마라도에서의 2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은 , 저에게 깊고도 긴 여운을 남겼습니다. 해안선 길이 4.2km의 이 작은 섬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저는 대한민국 최남단이라는 지리적 특성뿐 아니라, 마라도만이 가진 특별한 아름다움과 묵직한 상징성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거친 파도와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도 굳건히 뿌리내린 생명력, 그리고 인간의 흔적이 최소한으로만 남아있는 순수한 자연의 모습은 제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마라도의 탁 트인 자연은 제 시야를 넓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팍팍한 일상 속에서 잊고 지냈던 소중한 가치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습니다.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고, 삶의 본질적인 의미를 되새기며, 바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스스로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마라도를 떠나오는 뱃길 위에서도 섬의 푸른 풍경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그곳에서 느꼈던 평온함은 잊히지 않고 제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문득 마라도가 지닌 '시작점'으로서의 의미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태평양에서 배를 타고 대륙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만나는 시작점이자 끝점인 마라도의 또 다른 역할처럼 , 이곳에서의 경험은 제 삶에 새로운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소중한 시작점이 되어주었습니다. 짧은 탐방이었지만, 저는 마라도에서 대자연의 경이로움과 더불어 꿋꿋하게 삶을 이어가는 작은 존재들의 위대함을 보았고, 그 안에서 저 자신의 내면을 한층 더 단단하게 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마라도에서의 탐방은 단순한 여행을 넘어, 저의 내면을 풍요롭게 채워주고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해 준 의미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마라도의 바람을 맞으며, 그곳에서 얻었던 깨달음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