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절벽에 새겨진 거대한 시간의 흔적
경남 고성에 자리한 상족암군립공원은 이름부터가 조금 낯설다. 처음 이곳을 들었을 때만 해도 “암”이라는 글자에 단순한 바위산을 떠올렸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그 풍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바닷가 절벽에 드러난 바위들이 층층이 겹쳐 있으며, 파도와 바람에 깎여 형성된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지질학 교과서였다. 특히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모습은 자연의 조각 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공원 입구에서부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넓은 주차장과 깔끔하게 정비된 탐방 안내판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이끄는 대로 바닷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바위 절벽 아래로 이어진 길 위에서 특별한 흔적이 나타났다. 바로 공룡 발자국 화석이다. 언뜻 보면 그냥 움푹 패인 돌바닥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발가락 자국이 또렷하다. 초등학교 때 과학책에서 보던 그림 속의 발자국이 실제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순간 수천만 년 전 이곳을 뛰놀던 거대한 생명체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특히 이곳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공룡 발자국 화석 산지라 한다. 흔히 미국이나 중국에서만 볼 수 있을 줄 알았던 그런 장면이, 바로 한국의 바닷가 절벽에서 만나진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발자국 크기는 다양했는데, 성인의 손바닥만 한 작은 것에서부터 내 발보다 훨씬 큰 것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 흔적들은 마치 공룡 가족이 함께 걸어간 듯한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이 길을 먼저 걸었던 이가 바로 공룡이었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바닷바람은 짭짤하게 옷깃을 스치고, 절벽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거대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발자국 하나에도 당시의 생태와 습성이 담겨 있다고 하니, 눈앞의 작은 움푹 패임조차도 귀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서서 발자국 옆에 발을 포개어 보았다. 물론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차이가 났지만, 그 순간만큼은 공룡의 걸음에 발맞추어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파도와 바위가 빚어낸 풍경 속을 거닐다
상족암군립공원은 단순히 화석만 유명한 곳이 아니다. 바다와 절벽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바다를 향해 펼쳐진 상족암 해변은 모래보다는 자갈이 많았는데, 그 덕분에 파도 소리가 더욱 청아하게 들렸다. 자갈이 파도에 밀리고 쓸리며 내는 사각거림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독특한 음악처럼 들린다.
절벽 위로 올라가는 길도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곳에서 바라본 풍경은 장관이었다. 남해의 푸른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절벽 아래 바위틈으로 하얀 포말이 부서지는 모습은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 화면 같았다. 바람은 조금 거칠었지만, 그 거침이 오히려 바다와 절벽의 웅장함을 더했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바닷물 냄새가 진하게 밀려오자 도심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해방감이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곳곳에는 기묘한 바위들이 서 있었다. 어떤 바위는 거대한 새의 부리를 닮았고, 어떤 것은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면 금세 전설 속 주인공이 튀어나올 듯한 형상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은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고, 혼자 온 나 또한 잠시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자연이 만들어낸 풍경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있었고, 그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동심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나는 바위 위에 잠시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수평선은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파도는 끊임없이 절벽을 두드리며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 소리를 냈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 보니 마음속에 쌓였던 복잡한 생각들이 하나둘 정리되는 듯했다. 도시의 소음과 바쁜 일정 속에서 잊고 있던 여유가 파도와 함께 찾아왔고, 나도 모르게 깊은 숨을 내쉬었다. 자연 앞에서는 그저 작은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탐방의 끝에서 다시 만난 공룡
공원을 따라 걷다 보면 중간중간 전시관과 체험 공간이 나타난다. 고성공룡박물관은 특히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 인기였다. 나는 시간이 한정적이라 길게 둘러보진 못했지만, 밖에서 본 거대한 공룡 모형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이 그 앞에서 연신 사진을 찍고 뛰어노는 모습이 활기차 보였다. 한쪽에서는 부모가 아이에게 공룡의 이름과 습성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었는데, 그 풍경이 마치 시간여행을 떠난 듯 따뜻하게 다가왔다.
탐방길 마지막 구간에서 다시 만난 것은 또 다른 공룡 발자국 무리였다. 이번에는 훨씬 또렷하고 길게 이어져 있었다. 바닷물에 잠겼다 드러나기를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인간의 발자취는 몇 년만 지나도 흔적조차 사라지는데, 공룡의 발자국은 수천만 년을 버텨 지금까지 남아 있다니, 이보다 더한 ‘시간의 기록’이 있을까 싶다. 발자국을 따라 걷다 보니 내가 아니라 공룡이 먼저 이 길을 걸었음을 인정하게 되고, 그 앞에서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졌다.
오늘 내가 상족암에서 얻은 것은 단순한 풍경 감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자연이 품은 시간의 힘을 온몸으로 느낀 경험이었다. 우리는 이 땅 위를 잠시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지만, 바다와 바위, 그리고 공룡의 발자국은 묵묵히 수억 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오늘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앞에서 인간의 고민과 바쁨은 얼마나 사소한 것일까 하는 겸허한 마음이 들었다.
공원을 떠나며 차창 밖으로 다시 스쳐 지나가는 절벽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을 수 있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여유롭게 시간을 들여 발자국 하나하나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그때는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이 흔적이 바로 수천만 년 전 공룡이 남긴 발자취란다” 하고 들려주고 싶다. 상족암군립공원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시간과 생명의 경이로움을 일깨워주는 특별한 탐방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