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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설악의 척추를 걷다 : 오색에서 대청봉을 거쳐 백담사까지

by 현진코코 2025. 10. 13.

오색의 새벽, 산의 문을 열다

새벽 3시 정각, 남설악 탐방지원센터 앞.
새벽 3시 정각, 남설악 탐방지원센터 앞.

새벽 3시 정각, 남설악 탐방지원센터 앞. 이후마 사진은 카메라 조작 실수로 망침


별빛이 머리 위에서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 세상은 잠들어 있었지만, 산은 이미 숨을 쉬고 있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몇몇 헤드랜턴 불빛이 계곡 사이를 오르내렸다. “오늘은 대청봉까지 간다.”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가쁜 숨을 고르고, 첫 발을 내디뎠다.

오색 코스의 초입은 부드럽지만, 곧이어 돌계단이 이어지며 기세를 올린다. 한걸음마다 산의 무게가 실린다. 새벽 공기가 차가워 장갑 안 손끝이 시렸고, 헤드랜턴 불빛 속에서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자 이마의 땀이 식으며 식은땀으로 변했다.

새벽 5시를 넘기자 동쪽 하늘이 조금씩 붉게 물들었다. 나무 사이로 여명이 스며들며 세상이 깨어났다. 그때부터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산이 나를 받아주는 느낌이었다. 오색 코스는 ‘직진의 미학’이라 불릴 만큼 꾸준한 오르막이다.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걸었다.
숨을 고르며 바위 위에 잠시 앉으니 계곡 물소리가 바람을 따라 올라왔다. 산은 고요했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생명의 숨결이 있었다.

대청봉의 바람, 세상의 꼭대기에서 만난 고요

 

오전 9시, 드디어 대청봉 정상에 섰다.


7학년의 노구와 사진모음을 만들며 오르기에 남들보다 걸음이 늦다. 6시간의 오름 끝에서 만난 정상은, 그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이었다. 해발 1,708미터, 설악의 하늘이 코앞에 닿았다. 바람은 거칠었지만, 그 바람조차 성스러웠다.

해가 완전히 솟아오르며 산 능선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구름이 능선 사이를 흐르고, 동쪽으로는 푸른 동해가 손에 잡힐 듯 펼쳐졌다. 정상석 앞에는 이미 등산객들이 모여 있었다. 어떤 이는 커피를 끓이며 서로 인사를 나누고, 어떤 이는 조용히 기도하듯 서 있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 섞이지 않고 조금 떨어진 바위 위에 앉았다. 손에 쥔 따뜻한 물 한 모금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숨소리와 바람소리만이 들렸다. 그 순간, ‘산은 결국 침묵의 예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등 뒤로 비치는 햇살이 따뜻해지자, 이제 내려갈 시간이 되었다. 아직 봉정암과 백담사까지의 길이 남아 있다. 오늘의 종주는 끝이 아니라 중간이었다.

 

중청의 고요, 봉정암으로 향하는 순례의 길

 

대청봉에서 중청대피소까지는 불과 10여 분 거리지만, 그 사이에도 설악의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중청대피소 앞에서 잠시 앉아 초코바 하나를 베어 물었다. 옆자리에서는 젊은 등산객 둘이 “이래서 산에 오지!” 하며 웃고 있었다. 그 한마디가 모든 걸 설명하는 듯했다.

중청을 지나 봉정암으로 향하는 길은, 산이 내게 주는 또 다른 시험이었다. 급경사 내리막과 바위길이 이어지며, 발끝마다 긴장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만큼 고요했다. 바람이 멈추고, 나무 사이로 구름이 손짓했다. 봉정암 가는 길은 단순한 등산로가 아니라 ‘기도의 길’이었다.

길가에 작은 돌탑이 하나 서 있었다. 누군가 올려놓은 돌 위에 또 다른 손길이 얹혀 있었다. 나도 그 위에 돌 하나를 올렸다. “무사히 내려가게 해주세요.” 말은 짧았지만, 마음은 길었다. 

 

오전 11시 30분, 드디어 봉정암에 닿았다.


바위 절벽 위에 자리한 이 사찰은 마치 구름 위의 섬 같았다. 경내에는 종소리 하나 울리지 않았지만, 그 침묵 자체가 기도처럼 느껴졌다. 한참을 마당에 서 있다가, 합장한 채 고개를 숙였다.
“이 평화가 내 안에도 머물기를.”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백담사로의 하산, 긴 여운의 끝에서

봉정암을 떠나 백담사로 내려가는 길은 길고 험했다. 하지만 그 길은 내려감이 아니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산죽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고, 바람이 이마의 땀을 식혔다. 고개를 들면 멀리 능선마다 구름이 걸려 있었다.

정오가 지나자 하산길의 돌길이 미끄럽게 변했다. 발목을 다치지 않으려 천천히 걸었다. 느린 걸음이 오히려 풍경을 더 깊게 보게 했다. 지나온 대청봉의 능선이 멀리서 손짓하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마음속에서 조용히 울렸다.

 

오후 16시, 백담사 주차장에 도착.


긴 하루가 끝났다. 땀에 젖은 옷을 벗고 벤치에 앉으니, 발바닥이 쑤시면서도 묘하게 뿌듯했다. 버스에 올라타 창밖을 보니 산이 점점 멀어졌다. 그제야 진짜로 하루가 마무리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백담사는 늘 그렇듯 고요했다. 사찰 앞 계곡물 소리가 마음의 먼지를 씻어주었다. 설악의 품에서 하루를 보낸 나는, 다시 일상의 사람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분명히 아는 건 하나다.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단단해졌다는 것.

오색에서 새벽 3시에 출발해 대청봉에 오른 9시, 그리고 백담사에 닿은 오후 4시까지.


13시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서두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종주라 하면 ‘정복’이라 생각하지만, 설악은 그런 마음을 단숨에 꺾는다. 산은 인간의 속도를 비웃는다. 오히려 천천히 걸을수록 산은 자신을 내어준다. 헐떡이는 숨 사이로 들려오는 바람 소리, 나뭇잎이 부딪히는 작은 음악들, 그리고 발밑에서 찌릿하게 전해지는 돌의 체온까지. 그것들은 모두 산의 언어였다.

정상에서는 세상을 내려다봤고, 봉정암에서는 나 자신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백담사로 내려오며 깨달았다. ‘산행이란 오르내림의 기술이 아니라 마음의 정리법이구나.’ 우리가 인생에서 반복하는 수많은 오르막과 내리막도 결국은 같은 이치다. 오를 때는 겸손하게, 내려올 때는 감사하게.

백담사 앞에서 계곡물에 손을 씻었다. 차가운 물결이 손바닥을 감돌며 오늘의 피로를 씻어냈다. 그 순간, 문득 웃음이 났다. 힘들었던 길이 모두 사라지고, 마음만 남았다.
“그래, 또 오자.”
누가 들었는지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설악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 ‘언제든 오라’는 온기가 담겨 있었다.

버스 창밖으로 멀어지는 능선을 보며 생각했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산을 다녀온 사람은 결코 예전의 그가 아니다. 오늘의 나도 그랬다. 땀과 바람과 고요가 엉켜 만들어진 하루가, 내 안에서 새로운 문장을 썼다.
“산은 내 몸으로 쓴 가장 긴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