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길이 부른 아침, 첫걸음을 떼다
청주에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행운이다. 도시 한복판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오랜 세월을 품은 산성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상당산성은 그중에서도 내 마음을 자주 불러내는 곳이다. 산성의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단순히 운동 삼아 나온 산책객의 발걸음을 넘어, 역사의 한 장면을 밟고 있다는 묘한 기분이 든다.
이른 아침, 아직 도시의 소음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 발걸음을 옮겼다. 초입에 들어서자 가을 햇살이 솔잎 사이로 가볍게 쏟아졌다. 솔향에 섞여 온도 낮은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이 길은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다. 1천 년도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이들이 오르내렸고, 그들의 이야기가 발자국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 길이다. 한양을 지키던 남한산성에 비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청주 사람들의 일상 속에는 이 성곽이 늘 든든히 버티고 있었다.
성문을 향해 오르는 길은 예상보다 가팔랐다. 하지만 돌계단마다 힘들다는 생각보다 신선한 기운이 더 크게 들어왔다. 땅거미 질 때 오르면 또 다른 맛이 있다지만, 아침 햇살 속에서 마주하는 상당산성은 활기와 차분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성곽 위에서 마주한 시간 여행
산성의 돌담은 가까이에서 보면 그 거칠고 무거운 표정이 더욱 선명하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스며든 돌들은, 마치 “나는 이 자리를 지켜왔다”라고 말하는 듯 묵묵하다. 성곽 위에 오르니, 탁 트인 시야가 펼쳐졌다. 청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고, 멀리 무심천의 물길은 은빛 실처럼 반짝이며 흐르고 있었다.
저 광활한 풍경을 보며 나는 문득 ‘성곽을 쌓던 이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시설이었을까, 아니면 후대 사람들에게 이 도시를 지켜내겠다는 일종의 다짐이었을까. 성은 단순히 돌과 흙을 쌓아 올린 구조물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불안과 염원, 그리고 생존의 의지가 고스란히 깃든 결과물이다.
바람은 성벽을 타고 흘러와 땀방울을 식혀주었다. 옆에서는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나누고 있었다. 누군가는 손주에게 성곽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다른 이는 카메라에 풍경을 담느라 여념이 없다. 각자의 방식으로 성곽을 즐기고 있었지만, 모두가 이곳에서 ‘시간 여행’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나는 성곽 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돌 틈 사이에 뿌리 내린 풀꽃들은 작은 생명의 끈질김을 보여주었고, 군데군데 남아 있는 옛 성문터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지점을 알려주었다. 역사는 늘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발 밑에, 손이 닿는 이 돌담 위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산성을 내려오며 얻은 깨달음
탐방의 끝은 언제나 내려오는 길에서 온다. 오를 때는 호기심과 기대가 발걸음을 이끌지만, 내려올 때는 성곽에서 받은 인상과 사유가 천천히 가라앉으며 나를 채운다. 상당산성도 마찬가지였다.
돌담을 따라 내려오면서 나는 내 삶의 성곽에 대해 생각했다. 세상과 맞서는 나만의 방어선은 무엇일까? 지나온 세월 속에서 내가 쌓아 올린 성곽은 얼마나 단단할까? 나이를 먹을수록 중요한 것은 높고 두터운 성곽이 아니라, 바람이 드나들 수 있는 숨통과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여백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산성의 한 켠에서 장터가 열리는 날이면, 이곳은 더욱 활기를 띤다. 역사의 무게와 생활의 소박함이 공존하는 풍경은 ‘산성은 단지 옛 유물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오늘도 산성을 찾은 이들이 걷고, 쉬고, 웃으며 이야기를 쌓아 올리고 있다. 과거가 현재를 품고, 현재가 다시 미래로 이어지는 과정이 이 돌담 위에서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성문을 나서니 이미 햇살은 한낮의 기운으로 치솟아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가벼웠다. 단단한 돌담을 따라 걸으며 얻은 건 역사적 감흥만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작은 힌트였다. 오래된 돌처럼, 묵묵히 그러나 단단하게, 그리고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오늘 상당산성이 내게 건네준 가장 큰 가르침이었다.
청주 상당산성은 단순히 ‘오래된 성곽’이 아니다
돌 하나하나가 역사의 숨결을 품고 있으며, 그 위로 걷는 순간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마치 오래된 가족사진을 들여다볼 때 느껴지는 기묘한 친근함처럼, 성곽은 과거 사람들의 발자취와 오늘 우리의 발걸음을 나란히 이어준다. 그래서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우리 삶을 비추어주는 거울 같은 곳이다.
도시의 일상은 언제나 빠르게 흘러간다. 스마트폰 알림에 쫓기고, 끝없는 일정에 허덕이며, 누군가는 여전히 내일을 걱정한다. 하지만 상당산성에 오르는 순간, 그 모든 소음이 멀리 흩어지고 오직 ‘돌담 위의 나’만 남는다. 천천히 걷다 보면, 무너질 듯한 내 마음에도 돌 하나하나가 차곡차곡 쌓이듯 단단한 힘이 깃든다. 누구라도 이곳을 찾는다면, 마음속에 자기만의 작은 성곽 하나를 새겨갈 수 있으리라. 그 성곽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삶이 흔들릴 때 나를 붙잡아주는 울타리가 되고, 외로움이 찾아올 때 기대어 쉴 수 있는 의지가 된다.
또한 그 성곽은 단순히 방어의 상징만이 아니다. 오래된 돌담이 무너진 곳마다 새 풀이 돋고 꽃이 피어나듯, 삶의 성곽에도 균열과 여백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또 다른 내일을 향한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무너진 자리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길로 삼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산성이 우리에게 전하는 지혜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이 길이 눈 속에 묻히기 전에 이 산성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단순히 걷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을 정돈하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성곽 위에서 마주한 고요와 바람, 그 속에 숨어 있는 시간의 목소리가 나를 다시 불러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이곳에서 수백 년 전을 살았던 이들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며, 오늘의 나를 지켜내고, 내일의 나를 다짐한다. 청주 상당산성은 결국 ‘돌로 쌓은 벽’이 아니라, 나를 지탱해주는 또 하나의 삶의 스승이 되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