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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왕곡마을 탐방기

by 휘준스토리 2025. 10. 26.

동해 바람이 불어오는 길목
동해 바람이 불어오는 길목

동해의 바람이 불어오는 길목에서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의 왕곡마을은 동해의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길목에 자리한, 우리 전통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차로 해안선을 따라 달리다 보면 푸른 바다와 맞닿은 길 끝에 ‘왕곡마을’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 순간부터 마치 시간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듯한 기분이 든다.

 

왕곡마을의 기원은 고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조선 후기 전란과 화재를 피해 이주한 이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면서 본격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갖추었다. 특히 함경도에서 내려온 이주민들이 많았는데, 이로 인해 마을의 언어, 풍습, 건축 양식에 이북의 색채가 짙게 스며들었다. 그래서 왕곡마을은 단순히 강원도의 한 고장이 아니라, 이북 문화가 남하해 정착한 독특한 ‘문화 교차점’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마을을 ‘살아 있는 민속촌’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른 전통 마을이 복원이나 재현을 통해 조성된 것과 달리, 왕곡마을은 실제 주민들이 세대를 이어 살아오며 지켜온 삶의 공간이다. 골목마다 스민 기운은 단순한 옛 건축물의 정취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의 무게와 역사를 함께 품고 있다.

 

돌담길과 초가, 그리고 사람들의 삶

 

왕곡마을의 첫인상은 돌담길이다. 부드럽게 둥근 강돌을 쌓아 올린 담장은 높지 않지만, 마을을 품어 안는 듯 따스한 기운을 준다. 돌담 사이로 이어진 좁은 길을 따라가면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이 어깨를 나란히 한 풍경이 나타난다. 이곳의 가옥들은 남부 지방의 전형적인 한옥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함경도식 건축 양식이 반영된 탓이다. 예컨대 지붕은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낮게 눌려 있으며, 기단은 강설량이 많은 강원도의 겨울을 견디도록 높게 올려져 있다. 또 집은 대체로 ‘ㅁ자형’ 구조로 지어져 있는데, 이는 바람을 차단하고 안마당을 아늑하게 지키려는 지혜의 산물이다.

 

초가지붕 위에는 억새와 볏짚이 엮여 있어 계절마다 다른 빛깔을 띤다. 봄에는 연둣빛 새싹과 어우러지고, 여름에는 짙푸른 녹음에 감싸이며,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빛나다가 겨울에는 눈을 덮어 하얀 지붕이 된다. 계절의 순환 속에서 집은 그저 풍경이 아니라, 주민들의 삶을 품은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인다. 마당에는 장독대가 줄지어 놓여 있고, 곳곳에는 물길을 따라 조성된 우물이 남아 있다. 마을 어르신들에 따르면 예전에는 이 우물이 주민들의 생활의 중심이자 만남의 장소였다고 한다. 물을 길으러 모인 이웃들이 안부를 나누고 소식을 전하며 공동체를 이어온 것이다.

 

왕곡마을의 삶은 농사와 어업이 맞닿아 있었다. 가까운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생활을 이어가기도 했고, 마을 주변 들판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했다. 지금은 농업이나 어업보다 관광에 기반한 수입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마을 곳곳에는 어제의 삶을 짐작케 하는 흔적이 남아 있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살아 있는 박물관’

 

왕곡마을은 1988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인 보존 사업이 시작되었다. 당시만 해도 낡은 가옥들이 많아 훼손 우려가 컸으나, 복원과 보존을 병행하며 마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현재는 20여 채의 전통가옥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일부는 한옥체험관으로 운영되어 방문객들에게 숙박 체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단순히 전통 가옥을 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마을에서는 전통 음식 만들기, 다도 체험, 전통 놀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관람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런 체험 속에서 왕곡마을은 ‘과거를 재현한 전시관’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거와 대화하는 공간으로 거듭난다.

 

또한 왕곡마을은 학문적 가치도 크다. 함경도 이주민들의 문화와 강원도의 토착 문화가 융합된 사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언어학자들은 이곳 주민들의 사투리 속에서 함경도 방언의 흔적을 찾기도 하고, 건축학자들은 마을 가옥의 배치와 구조에서 지역 간 문화 교류의 흔적을 연구하기도 한다. 이처럼 왕곡마을은 관광 자원인 동시에 귀중한 연구 자산이기도 하다.

 

마을이 던지는 의미와 교훈

 

왕곡마을을 걸으며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시간의 층위’였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듯한 체험이 이어졌다. 오래된 초가집 앞에 서 있으면 선조들의 삶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기와지붕 위에 드리운 전깃줄을 보면 현대의 시간이 겹쳐진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왕곡마을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큰 의미다. 단순히 옛 건물을 보존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삶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는 우리가 전통을 대하는 태도가 단순히 ‘간직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현재와 연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왕곡마을이 사라졌다면 우리는 무엇을 잃었을까? 아마 단순히 오래된 집 몇 채가 아니라, 지역과 세대를 잇는 기억과 이야기, 그리고 공동체의 온기를 잃었을 것이다. 그래서 왕곡마을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를 묻는 소중한 거울과 같다.

 

왕곡마을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시간의 무대이며, 지역과 민족의 역사가 새겨진 공간이다.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초가지붕, 돌담길을 따라 이어지는 사람들의 발자취, 그리고 그 속에 깃든 삶의 지혜가 모여 왕곡마을만의 풍경을 완성한다.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는다면, 계절을 달리해 마을이 보여주는 또 다른 얼굴을 만나보고 싶다. 겨울 눈이 덮인 초가지붕이나 여름의 짙은 녹음을 배경으로 한 기와집은 또 다른 감흥을 줄 것이다. 그때도 나는 이 마을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시간과 전통이 어우러진 공간 속을 천천히 걸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