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라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푸른 바다, 솟아오른 한라산, 그리고 우뚝 선 돌하르방. 그러나 이 익숙한 풍경 뒤편, 혹은 그 익숙함 속 깊숙이 숨어있는 제주의 진짜 심장 박동을 느끼고 싶다면, 관광객의 북적거림을 잠시 뒤로하고 투박하게 쌓아 올린 검은 돌담이 끝없이 이어지는 옛길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제주의 진정한 이야기는 시끌벅적한 관광지 대신, 이곳 돌담 사이를 휘감아 도는 바람의 속삭임과, 그 바람의 모든 것을 묵묵히 들어준 돌담의 귀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돌담길은 마치 시간의 터널과 같아서,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수백 년 제주의 삶과 지혜가 바람처럼, 혹은 돌멩이처럼 단단하게 다가온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관광객이 아닌 여행자가 된다.
바람의 혀, 제주의 모든 것을 읊조리다
제주의 바람은 단순한 공기의 흐름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숨 쉬는 제주의 영혼이자, 섬의 모든 비밀을 간직한 채 쉼 없이 움직이는 이야기꾼과도 같다. 바다의 짠내와 한라산의 풀 내음을 섞어 나르며, 때로는 잔잔한 어루만짐으로, 때로는 휘몰아치는 기상으로 섬의 모든 것을 깨운다. 이 바람이 돌담 사이를 스쳐 지날 때마다, 고르지 못한 돌 틈에서 마치 혀를 내미는 듯 '쉬이익, 싸악, 후욱' 하는 기이한 소리를 낸다.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마치 오랜 세월의 먼지를 털어내며 옛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살아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어쩌면 이 바람은, 수백 년 전 제주 사람들이 돌담을 쌓고, 그 옆에서 삶을 일구며 주고받았던 시시콜콜한 농담이나, 애틋한 연정의 고백을 기억하고 있다가, 지금의 나에게 들려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람의 억양은 때론 애잔한 멜로디 같기도 하고, 때론 거친 삶의 투박한 외침 같기도 하다. 봄에는 따뜻한 온기를 머금고 밭에 나선 아낙들의 노랫가락을 실어 나르고, 여름에는 뜨거운 햇살을 식혀주며 한낮의 낮잠을 재촉한다. 가을에는 억새밭을 은빛 파도로 만들며 쓸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겨울에는 '샛바람'(동풍)과 '하늬바람'(서풍)이 번갈아 몰아치며 제주 사람들의 인내심을 시험하기도 한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과 세기에 따라 그날의 작업 방식이 달라지고, 심지어는 마을 잔치의 흥망성쇠까지 좌우했으니, 제주인들에게 바람은 단순한 자연현상을 넘어 삶의 동반자이자 운명이었다.
'하, 이 바람 양반, 꽤나 수다쟁이시네! 어제는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셨수?' 하고 혼잣말을 던지면, 바람은 또 다시 '쉬이익' 하고 대답하듯 스쳐 지나간다. 참, 이런 게 바로 자연과의 유머 섞인 교감 아니겠는가. 바람은 제주인의 고달픈 노동의 숨소리였고, 외롭고 척박한 삶 속에서 마음을 달래주던 유일한 친구였으며, 때로는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게 하는 거대한 자연의 힘이었다. 바람은 제주 자체의 언어이며, 그 언어는 아직도 돌담 틈새에서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다.
돌담의 귀, 삶의 무게를 경청하다
바람의 모든 이야기를 고요히 받아들인 것은 다름 아닌 돌담이었다. 제주도의 돌담은 그저 경계를 나누는 구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 삶에 대한 지혜,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돌 한 조각 한 조각에 스며든 건축물 이상의 존재다. '퐁낭(팽나무)' 아래 쉬어가다 보면 만나는 나지막한 밭담, 혹은 초가지붕 아래 넉넉히 둘러진 집담, 그리고 바닷가에 물고기를 가두던 '원담'에 이르기까지, 돌담은 그 쓰임새만큼이나 다양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 이 돌담들은 마치 아무렇게나 쌓은 듯 보이지만, 실은 그 어떤 시멘트보다도 끈끈한 제주인의 지혜와 인내심으로 쌓아 올린 결집체다.
그 견고함의 비밀은 역설적으로 '틈'에 있다. 바람의 압력을 최소화하고 물 빠짐을 좋게 하기 위해 틈을 숭숭 내어 쌓는 '엉성한' 방식이 실은 가장 견고한 지혜였던 셈이다. 이 틈으로 바람이 통과하며, 돌담은 쓰러지지 않고 수백 년을 견뎌왔다. 그 틈새 하나하나가 마치 숨구멍 같으니, 돌담은 어쩌면 제주의 땅이 내쉬는 깊은 숨이자, 세월의 모든 소리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귀였을 것이다.
돌담을 쌓는 기술은 단순히 돌을 쌓는 것을 넘어, 바람의 길을 읽고 물의 흐름을 이해하며 땅의 기운과 소통하는 제주의 오래된 삶의 철학이었다. 돌과 돌 사이, 그 틈으로 햇살이 새어 들고 풀벌레가 드나들며 작은 생명들이 둥지를 틀 듯, 제주 사람들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서로의 틈을 메워가며 공동체를 이루고 삶의 터전을 일궈냈다. 돌담은 외부의 역경으로부터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제주인의 필사적인 노력이 그 견고함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억척스럽지만 강인하고, 투박하지만 따뜻한 제주인들의 정서가 이 돌담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서로 기대어 견고함을 이루는 돌들처럼, 제주 공동체의 유대감과 협동 정신이 이 돌담 속에 숨어 있다. 마치 "혼자서는 쓸모없는 돌멩이도 함께 모이면 든든한 벽이 된다"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그 침묵 속에서 돌담은 제주의 모든 희로애락을 품어 안는 거대한 품이 되어주었다.
삶의 비망록을 담은 돌담길, 시간 속을 걷다
이 돌담길을 걷다 보면, 그 길을 수없이 오갔을 제주인들의 삶의 흔적이 겹겹이 느껴진다. 거센 바람을 뚫고 밭에서 돌아오던 농부의 지친 발자국, 차가운 바다에서 물질을 마치고 망사리를 들쳐 메고 귀가하던 해녀의 강인한 어깨, 그리고 그 모든 고단함을 잊게 할 어린 자식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돌담에 아로새겨져 있는 듯하다. 이 길은 단순한 통행로가 아니라, 생존의 길이었고, 사랑과 이별의 길이었으며, 때로는 오일장으로 향하는 희망의 길이기도 했다. 돌담은 단순히 물리적인 경계를 넘어, 가족의 울타리이자 마을의 방벽이 되었고, 한 집 건너 이웃의 대문을 감싸 안는 소통의 통로가 되기도 했다.
때로는 유머러스한 에피소드도 돌담길에서 만날 수 있다. 한번은 어느 돌담길을 걷다가 문득, 담벼락 한쪽이 마치 술 취한 노인처럼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고 할아버지, 술 한잔 하셨소?" 하며 너스레를 떨었더니, 지나가던 할머니 한 분이 빙긋 웃으며 "어이그, 저 담이 바람 좀 마이 줫댄 허멍 허는 짓이우다게! 젊은 사람이 몰르주!" 하시더라. (제주 사투리로 '아이고, 저 담이 바람을 많이 맞아서 하는 짓이에요! 젊은 사람이 뭘 알겠어요!' 정도의 의미일 터였다.) 그 말에 필자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 제가 돌담 전문가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압니까요, 할망?' 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억지로 세우거나 시멘트로 덧대려 하지 않고, 기울어진 돌담조차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제주 사람들의 여유와 지혜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돌담은 그들의 삶의 일부이자 친구이며, 때로는 함께 늙어가는 가족 같은 존재였다.
현대 사회의 발달과 함께 제주의 풍경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아파트와 리조트가 들어서고, 시멘트 담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제주 곳곳에 남아있는 오래된 돌담길은 변하지 않는 가치를 속삭인다. 인공적인 조작 없이, 오직 바람과 사람의 손길로 쌓아 올린 이 돌담은,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피어난 삶의 지혜와 공동체의 끈끈한 유대감을 상징한다. 돌담은 그저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시간과 역사를 담은 문화유산이자, 제주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살아있는 역사책이다.
돌담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발을 옮기는 행위를 넘어선다. 그것은 제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걷는 것과 다름없다. 바람과 돌담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돌 한 조각에 깃든 제주인의 삶과 지혜를 만끽하는 것은, 제주라는 섬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가장 확실하고 깊은 방법일 것이다. 우리 삶의 길 또한 수많은 돌멩이들을 쌓아 올린 돌담과 같지 않을까. 거센 바람을 견디고,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때로는 기울어지더라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것. 제주의 바람과 돌담은 오늘도 그렇게, 삶의 오래된 비망록을 조용히 써 내려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신만의 작은 이야기를 새겨 넣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