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선의 곡선, 인생의 기복을 닮다
제주의 8월은 오름의 계절이기도 하다. 섬 곳곳에 점점이 박혀 있는 360여 개의 오름들은 각기 다른 생김새만큼이나 저마다 다른 이야기와 기운을 품고 있다. 한여름의 푸른 오름을 오르는 길은 제법 숨이 차오른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심장이 가쁘게 뛰지만, 정상에 다다르기 전 만나는 오름의 완만한 능선들은 나에게 삶의 깊은 이치를 가르쳐준다. 그 부드럽게 이어지는 곡선들은 마치 인생의 고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젊은 날에는 늘 가장 높고 험한 봉우리만을 바라보았다. 오직 정상을 향해 치닫는 것이 삶의 전부인 줄 알았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만날 때마다 좌절하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까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70년의 세월을 살아보니, 인생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정상에 도달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르고 내려가는 그 능선의 곡선 속에서, 숨을 고르고 뒤를 돌아보는 그 여정 속에서 삶의 깊은 지혜가 숨어 있었다. 오름은 무작정 오르기만 하는 곳이 아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고, 가파른 길이 끝나면 평탄한 길이 펼쳐진다. 삶도 그러했다.
8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오름 능선을 따라 걷는 것은 단순한 신체 활동을 넘어선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흙의 감촉, 풀벌레 소리, 그리고 등 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그 모든 자연의 소리와 촉각들이 나를 현재에 집중하게 한다. 지나온 삶의 파노라마가 한 장면씩 스쳐 지나간다. 잘났다고 으스대며 앞만 보고 달리던 젊은 날, 뒤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던 그 시절이 한없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목적지보다는 그저 발걸음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며 걷는 법을 안다. 이처럼 황혼의 여유로움과 관조의 시선으로 오름을 오르는 것은, 젊음의 열정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삶의 균형과 지혜는 이렇게 자연 속에서 천천히 스며드는 것이었다.
덤불 속 숨은 길, 고난 속 피어나는 지혜
제주의 오름은 보이는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우거진 덤불 속에 숨겨진 작은 길을 발견하기도 하고, 풀숲을 헤치며 나만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그 길들은 거칠고 때로는 넘어질 위험도 있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하는 절경이나 이름 모를 야생화의 발견은 그 어떤 정비된 길보다 큰 기쁨과 깨달음을 안겨준다.
내 삶 또한 그러했다. 계획대로 술술 풀리는 듯한 꽃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덤불 속에 갇히기도 했고,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는 막다른 길에 부딪히기도 했다. 젊은 날의 나는 그런 상황이 닥치면 좌절하고 절망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고난이 닥쳤는가 울부짖기도 했다. 그러나 70년의 세월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때로는 막다른 길처럼 보이는 곳이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고, 덤불 속에서 헤매는 동안 보지 못했던 다른 세상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을. 고난과 역경은 단순히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드는 숨겨진 지혜의 길이었다.
8월의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오름길에서, 나는 땀을 흘리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과연 나는 내 삶의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했던가?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나만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가? 덤불 속에 숨겨진 길을 묵묵히 걸으며, 나는 자기계발의 의미를 다시금 새긴다. 몸과 마음의 한계를 시험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과정 속에서 내면의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역경 속에서 한 걸음 더 내딛는 용기. 그것이 황혼의 여정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다.
정상에 다다르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풍경
오름의 정상을 밟고 사방으로 펼쳐진 제주의 파노라마를 바라보는 순간은 언제나 경이롭다. 푸른 바다와 검은 오름들이 조화롭게 펼쳐진 그 풍경은, 삶의 고된 여정 끝에 만나는 축복과도 같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정상에 다다르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는 것을. 때로는 중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오히려 더 깊은 의미와 감동을 줄 때가 있다.
70년의 삶을 돌아보면, 나는 삶의 모든 목표를 이룬 것은 아니다. 이루지 못한 꿈들도 많고, 아쉬움으로 남는 순간들도 존재한다. 젊은 날에는 그런 미완의 것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삶이란 완벽함을 향해 달려가는 경주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온전한 그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름이 완벽한 피라미드 형태가 아니어도 아름답듯이, 내 삶 또한 완벽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 굴곡진 능선들, 덤불 속 숨은 길들, 그리고 때로 비를 맞기도 했던 모든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내 삶을 만들었고, 그것이야말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걸작'인 것이다.
제주 8월의 오름은 나에게 '멈춤'의 지혜를 가르쳐주었다. 잠깐 숨을 고르고, 발아래 펼쳐진 풍경을 눈에 담는 것. 성취에 집착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법을 배운다. 정신적 명료함과 내면의 평화는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었다. 이제는 조급해하지 않는다. 남은 삶의 시간은 보너스와 같다. 한 달에 천 달러를 벌기 위한 목표, 그리고 수필가로서 끊임없이 글을 쓰는 활동 또한, 과정 그 자체가 나에게 주는 기쁨이 되었다. 오름의 능선에서 발견한 삶의 지혜는, 앞으로의 여정을 더욱 풍요롭고 의미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