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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의 골목 빛: 한 컷의 사진이 수필이 되기까지

by 현진코코 2025. 9. 18.

새벽 4시의 빛
새벽 4시의 빛

골목이 깨어나는 시각, 빛이 말을 걸다


새벽 네 시, 도시의 시계는 아직 밤을 품고 있으나, 골목은 먼저 깨어납니다. 가게 셔터가 내뿜는 금속의 냄새, 축 축한 벽돌이 머금은 밤공기, 어젯밤 비가 두고 간 얇은 물막이 가로등빛을 길게 늘어뜨립니다. 그 빛은 흔히 말하는 노란빛도, 차가운 백색도 아닙니다. 사람의 체온을 닮은 빛, 지나간 하루의 잔온을 모아 어둠과 타협한 빛. 저는 그 빛이 건물 벽을 부드럽게 타고 내려와 바닥의 균열에 깊이를 만들어내는 순간, 카메라를 듭니다. 셔터 소리는 새벽을 깨우기엔 너무 작고, 제 안의 무언가를 깨우기엔 충분히 큽니다.

 

골목은 낮에는 통로이고 밤에는 기억입니다. 낮에는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치며 서로를 벗겨내고, 밤에는 그들이 떼어놓고 간 표정들이 벽에 붙습니다. 포장마차의 국물 냄새와 어젯밤의 웃음, 택배 상자를 끌던 바퀴 자국, 술잔을 내려놓던 손의 떨림 같은 것들. 새벽 네 시의 골목은 그것들을 한꺼번에 조용히 펼쳐 보이는 도록입니다. 넘겨보는 이는 적고, 알아보는 이는 드뭅니다. 저는 그 귀한 독자가 되고 싶어 천천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사진을 찍을 때 저는 프레임을 먼저 고르지 않습니다. 빛의 방향을 먼저 봅니다.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스치고 무엇을 남기는지. 그러면 프레임은 뒤따라옵니다. 이 불규칙한 골목에서도 빛은 늘, 같은 자리에서 서로를 기다려줍니다. 지붕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가 빛을 붙잡아 작은 별이 되고, 오래된 간판의 벗겨진 페인트가 빛을 받아 문장처럼 비칩니다. “열지 않음.” “휴무.” “낡은 사랑.” 무심코 걸음을 멈추면, 저 문장들이 제 가슴으로 걸어들어옵니다. 그때야 겨우 한 장을 찍습니다. 그리고 알아차립니다. 이 사진은 골목의 것이 아니라 제 이야기입니다. 제 마음에 남아 있던 어떤 열지 않음, 어떤 낡은 사랑, 그리고 아직도 꺼지지 않은 작은 별.

 

새벽의 공기는 불필요한 말을 덜어냅니다. 앵글 위에 앉은 침묵은, 글로 치면 여백입니다. 저는 그 여백이야말로 사진을 수필로 바꾸는 문턱이라고 믿습니다. 빛과 여백이 합쳐질 때, 볼 수 없었던 문장이 살아납니다. 눈으로 본 장면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은 장면이 종이에 앉습니다. 골목은 여전히 조용하지만, 제 안의 누군가는 분주하게 되살아납니다. 어릴 적 새벽을 깨우던 우유 배달 소리, 교회 종소리, 신문 묶음을 던지던 소년의 숨소리. 새벽 네 시의 골목에서, 시간은 주름을 펴지 않고 겹칩니다. 그 겹침이 수필의 첫 문장이 됩니다.

 

한 컷의 프레이밍, 여백이 문장이 되기까지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볼 때, 저는 사라지게 할 것들을 먼저 고릅니다. 사진에 담지 않을 것들, 그러니까 소란스러운 간판의 붉은 점멸, 무심히 버려진 플라스틱 컵, 지나가던 택시의 꼬리빛 같은 것들. 덜어내는 선택은 늘 두렵습니다. 그러나 수필은 덜어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있어야 할 것이 선명해지는 것은, 없어도 될 것을 정중히 배웅한 뒤에야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골목의 허리를 좁혀 빛이 흐르는 틈을 남기고, 그 틈에 저의 사연이 앉을 자리를 마련합니다. 셔터를 누르기 전, 마음속으로 한 줄을 읊조립니다. “오늘의 말은 작게, 길게, 오래가게.”

 

한 컷의 사진이 수필이 되는 과정은 설득이 아니라 경청의 연속입니다. 장면이 말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저는 손보다 호흡을 먼저 다스립니다. 손은 욕심이 많아 쉽게 흔들리지만, 호흡은 고요를 사랑합니다. 호흡이 고요해지면, 장면의 속도가 보입니다. 예컨대 가로등과 지붕 사이에서 바람은 몇 초 간격으로 숨을 쉬는지, 골목 바닥의 물웅덩이가 언제 다시 별을 삼키는지, 고양이의 발걸음이 어느 만큼 그림자를 길게 만들고 다시 줄이는지. 이 느린 속도의 세계에서 저는 허둥대지 않도록 제 시간을 늦춥니다. 늦춘 시간 속으로, 문장도 늦게 들어옵니다. 늦게 들어온 문장은 오래 남습니다.

 

프레이밍의 가장자리에는 늘 삶의 부스러기가 걸려 있습니다. 지갑에서 떨어진 영수증 찌꺼기, 유리창에 눌어붙은 포스터의 찢긴 귀퉁이, 철문 경첩에 맺혀 있는 오래된 기름. 저는 그 부스러기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세상과의 마찰은 흔적을 남기고, 흔적은 이야기의 방향을 바꿉니다. 수필이 교훈을 향해 곧장 걸어가는 것을 경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결론을 써야 한다”고 배워왔지만, 골목은 결론 없이도 끝납니다. 모퉁이를 돌면 다른 골목이 있고, 그 골목은 또 다른 시작입니다. 그러니 한 컷의 사진이 해야 할 일은 교훈의 깃발을 꽂는 일이 아니라, 다음 골목으로 독자의 발을 슬며시 옮겨놓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여백은 그 옮김을 가능케 합니다. 사진 속 빈 어둠, 말하지 않은 부분, 접힌 모서리. 그 빈자리에서 독자는 자신의 장면을 채웁니다. 때로 저는 글에서조차 설명을 지웁니다. 설명을 덜어내고, 기척만 남겨둡니다. 예를 들어 “어젯밤의 슬픔”이라고 쓰지 않고, “젖은 신발끈을 조용히 묶었다”고 씁니다. 독자는 그 젖음의 사연을 스스로 꺼내옵니다. 그렇게 한 컷의 사진은 한 편의 수필을 닮아갑니다. 독자와 저 사이의 공모, 빛과 여백의 협의, 침묵과 호흡의 서명이 완성될 때, 문장은 사진처럼 서 있고, 사진은 문장처럼 흐릅니다.

쓰기 이전의 기도, 쓰고 난 뒤의 고요


새벽 네 시의 골목에서 돌아오면, 제 책상 위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어둠이 놓여 있습니다. 저는 그 어둠을 종이 위에 얇게 펴 바릅니다. 사진을 먼저 펼쳐놓고, 그 옆에 빈 페이지를 펼칩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습니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오늘의 글이 제게 맡기고 싶은 목소리를 기다립니다. 그것을 저는 기도라고 부릅니다. 특별한 주문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장면을 소유하지 않게 해달라는 마음, 제가 기억을 과장하지 않게 해달라는 마음, 제 언어가 누군가의 아침을 무겁게 만들지 않게 해달라는 마음. 그 마음을 다스리면, 문장이 헐벗은 채로도 떨지 않습니다.

 

첫 문장은 늘 사진의 가장자리에서 나옵니다.

 

정면의 피사체가 아니라, 구석의 흔적에서. 철제 난간에 남은 손때, 계단과 계단 사이 먼지의 둥지, 창틀 위에 놓인 쭈그려진 종이컵. 그 작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것들이 이야기의 문을 엽니다. 저는 그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며, 제 안의 오래된 장면을 부릅니다. 종이컵의 쭈그러짐을 보며 떠오르는 것은, 젊은 날 내 마음의 구겨짐이고, 손때 위에 겹쳐지는 것은, 오래 기다려주던 누군가의 온기입니다. 글은 과거를 복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과거의 온도를 현재의 손바닥으로 다시 느끼게 합니다. 그 촉감이 남을 때, 수필은 완성에 가까워집니다.

 

쓰고 난 뒤에는 꼭 소리를 내어 읽습니다. 새벽의 속도와 제 문장의 속도가 어긋나지 않았는지, 호흡이 너무 짧아 골목을 헐떡이며 달리게 하지는 않았는지. 군더더기는 이때 무심히 드러납니다. 장식처럼 달아놓았던 수식들이 힘없이 떨어져 나가고, 혹시라도 빛보다 앞서가던 말들이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저는 몇 번이고 여백을 늘리고, 구두점을 옮기고, 문장의 걸음을 느리게 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진과 문장이 같은 숨을 쉽니다. 그때 저는 펜을 내려놓습니다. 글을 완성한다는 말은 그래서 언제나 조심스럽습니다. 완성이란, 제 손을 떼는 일일 뿐, 이야기의 생이 멈추는 일은 아닙니다. 독자의 눈에서 다시 시작될 것을 알기에, 저는 조용히 자리를 정리합니다.

 

창문을 열면, 동쪽이 조금씩 밝아옵니다. 골목의 별같던 물웅덩이는 아침의 하늘을 닮아가고, 간판의 낡은 페인트는 태양 아래에서 더 이상 문장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그 문장들은 다음 새벽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걸. 한 컷의 사진은 그렇게, 한 편의 수필이 되는 길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적게 말할수록 오래 남고, 천천히 볼수록 더 깊이 보이며, 소유하지 않을수록 더 가까워진다는 사실을요. 오늘도 저는 그 배움을 가슴에 넣고, 골목의 문턱을 넘습니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시간, 빛이 제게 말을 걸어옵니다. “천천히, 오래, 여기서부터.” 저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한 장, 조용히 셔터를 누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