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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다 구주 오셨네’의 현재 의미: 지구촌 평화가 시작되는 기쁜 인사

by 현진코코 2025. 9. 18.

지구촌 평화의 시작
지구촌 평화의 시작

한 줄의 찬송이 건네는 첫 인사, 기쁨이 길을 연다


허준님, 아침 공기를 가르는 첫 호흡처럼,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는 한 줄의 찬송은 겨울의 문턱마다 새롭게 태어납니다. 익숙한 선율이지만, 해마다 그 기쁨은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해가 바뀌고, 세상이 흔들리고, 각자의 마음 사정도 달라지니까요. 누군가에게 이 노래는 잃었던 용기를 되찾게 하는 손난로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멀어진 사람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봉투 같은 것입니다. 저는 이 노래를 “세상에 대한 첫 인사”라고 불러보고 싶습니다. 잘 지내셨나요, 라고 묻는 대신, 기쁨이 먼저 찾아왔다고 알리는 인사. 기쁨이 먼저 손을 내밀면 두려움은 고개를 든 채로도 물러서고, 마음은 자기 속도를 조금 늦춥니다. 느려진 마음은 비로소 듣습니다. 내 옆의 숨소리, 내 맞은편의 사연, 그리고 내 안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작은 불빛을요.

 

그러나 이 기쁨은 현실을 지우는 밝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처와 결핍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하는 정직한 빛입니다. “오셨다”는 말은 먼 신화를 끌어오는 말이 아니라, 지금-여기, 겨울의 차가움과 공존하는 현재형의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현재형을 새벽 길에서 가장 잘 배웁니다. 겨울 새벽, 마스크 너머로 흰 숨을 내쉬며 멈춰 선 이들, 알람이 울리기 전 빵 반죽을 치대는 손, 쓰레기봉투를 말없이 묶는 손가락 마디. 이 평범하고 고단한 손들이야말로, ‘오심’을 지탱하는 작은 제단 같아 보입니다. 기쁨은 이렇게 일상의 손바닥에 내려앉아 현실의 체온을 얻습니다. 눈부시지 않고, 오래 따뜻한 방식으로.

 

그래서일까요. “기쁘다”라고 입에 올릴 때, 저는 늘 마음속에서 “그러나”를 잠시 내려놓습니다. 기쁨이 억지로 끌어올린 표정이 되지 않도록, 먼저 숨을 고르고 둘러봅니다. 나의 오늘, 우리의 오늘에 이미 와 있는 작은 기쁨을. 새벽 벽돌 틈에 맺힌 서리, 버스 정류장 의자에 남아 있는 온기, 종소리보다 먼저 울리는 발걸음의 장단. 그 ‘이미’를 발견할 때, 노래는 더 이상 축제의 외침이 아니라, 삶의 인사법이 됩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오래 만난 벗에게, 천천히, 그러나 변함없이 건네는 첫마디처럼.

 

평화는 멀리서 오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시작된다


지구촌 평화. 큰 말입니다. 너무 커서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전쟁 소식은 화면 가장자리에서 실시간으로 깜빡이고, 서로 다른 언어와 신념은 때로는 울타리가 되고 때로는 창문이 됩니다. 이런 때 “평화”를 말하는 일은 어쩌면 망설임부터 배웁니다. 무엇부터 해야 할까. 누구를, 어디를, 어떻게. 하지만 저는 이 찬송이 가르쳐주는 지점을 떠올립니다. 오셨다. 먼 곳의 이상이 아니라 가까운 자리의 사건으로. 평화도 그러하지 않을까요.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먼저 건네는 인사에서, 한 집이 다른 집에 빵 한 조각을 나누는 자리에서, 한 도시가 가장 약한 속도를 기준으로 신호를 맞추는 거리에서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주머니 속의 작은 메모장에 “평화의 연습”이라는 제목을 써 두고, 가끔 항목을 채웁니다. 아주 사소한 것들입니다. 먼저 인사하기. 말할 때 속도를 맞추기. 다름을 설명하기보다 먼저 듣기. 틀린 것을 책망하기보다 시간이 필요함을 기다리기. 약속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것으로 타인의 하루를 존중하기. 이런 것들이 과연 지구촌을 바꿀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고개를 듭니다. 그렇다, 라고요. 평화는 큰 결의만으로는 유지되지 않습니다. 작은 습관들의 협약, 일상의 질서가 지키는 신뢰, 그 신뢰가 쌓여 만든 공동의 호흡이 있어야 합니다. 노래를 함께 부르면 호흡이 비슷해지듯, 평화는 일상의 호흡을 맞추는 데서 자랍니다.

 

그리고 이 연습에는 언제나 ‘낯선 이’가 등장합니다. 낯선 언어, 낯선 옷차림, 낯선 표정. 낯섦을 만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경계를 세우지만, 그 경계는 종종 우리 자신을 향하기도 합니다. 저는 교회 앞벤치에서, 혹은 시장 골목에서 낯선 이에게 먼저 미소를 건네보는 연습을 합니다.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먼저”라는 한 발짝이 있을 뿐입니다. 먼저 인사한 사람이 먼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넓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면 마음은 조금씩 해방됩니다. 그렇게 작은 해방을 서로에게 선물할 때, 평화는 추상에서 구체로, 멀리서 가까이로 옮겨 앉습니다.

 

평화에는 또 하나의 덕목이 있습니다. 기억을 다루는 일입니다. 상처의 기억을 지우지 않되, 상처의 방법으로만 말하지 않는 용기. 우리는 아파 본 사람이 아픔을 더 잘 안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말하고, 더 천천히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는 바로 그 천천함을 가르쳐 줍니다. 가장 낮은 자리, 가장 작은 몸짓으로. 평화는 고함이 아니라 속삭임의 문법을 씁니다. 속삭임은 가까워야 들리고, 가까워야 전해집니다. 지구촌의 평화가 시작되는 자리란, 어쩌면 이렇게 가까움이 허락되는 반경일지도 모릅니다. 식탁 하나, 의자 두 개, 그리고 서로의 눈을 피하지 않는 한 사람의 얼굴.

 

오늘의 기쁜 인사, 내일의 평화를 준비하는 손끝


찬송이 끝나고도 마음에 남는 울림이 있습니다. 그 울림은 우리를 밖으로 보내고, 작은 결심으로 이끕니다. 저는 그 결심을 “기쁜 인사”의 확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안부를 묻는 말이 행동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이지요. 그래서 저는 하루의 문턱에서 몇 가지를 손끝에 새겨 봅니다. 먼저, 오늘 만날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며 미리 축복을 건네는 일. 마음속 인사가 먼저 건너가면, 실제의 인사는 더 따뜻해집니다. 다음으로, 말의 양을 줄이고 시선을 오래 두는 일. 시선은 상대의 존재를 인증하는 가장 온화한 도장 같아서, 말보다 깊은 안심을 남깁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틀릴 수 있음을 문장의 여백에 남겨두는 일. 여백을 두면 수정할 수 있고, 수정할 수 있으면 관계는 부서지지 않습니다.

 

겨울의 빛은 짧고, 그림자는 깁니다. 짧은 밝음에 마음이 조급해질 때가 있지만, 오히려 긴 그림자 덕분에 우리 앞의 사물들이 더 입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신앙의 계절도 비슷합니다. 환희의 시간과 침묵의 시간이 서로의 길이를 재며 우리를 깊어지게 합니다. “오셨네”라는 선언은 환희의 깃발이지만, 그 깃발이 바람 속에서도 떨어지지 않으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깃대를 붙잡는 손이 있어야 합니다. 그 손이 바로 우리의 일상입니다. 출근길의 양보, 가족 안에서의 사과, 이웃에게 건네는 따뜻한 국 한 그릇, 멀리 있는 분쟁 지역을 위해 드리는 짧은 기도와 작은 후원. 거창하지 않지만, 깃대를 붙잡는 힘은 이러한 평범함에서 나옵니다.

 

저는 때때로 이 노래를 조용히 흥얼거리며 사진기를 듭니다. 렌즈는 빛을 모으고, 마음은 장면을 경청합니다. 그러다 한 아이가 장난감을 친구에게 내어주는 순간을 만나거나, 상점 주인이 문 앞의 눈을 자신의 구역 너머까지 쓸어내는 모습을 볼 때, 저는 알아봅니다. 아, 평화가 여기서 시작되고 있구나. 지구의 반대편을 향한 기도가 언젠가 도달하듯, 오늘 내 눈앞에서 시작된 작은 친절은 보이지 않는 경로를 타고 멀리까지 퍼져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기쁨으로 시작한 인사가, 언젠가 누군가의 밤을 덜 춥게 만들 것입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이 문장은 어제의 신앙이 아니라 오늘의 과제이며, 내일을 위한 약속입니다. 기쁨은 시대를 건너도 변하지 않지만, 그 표현은 매번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새로 배웁니다. 어떻게 기쁨을 말할지, 어떻게 평화를 시작할지. 큰 목소리로가 아니라, 분명한 목소리로. 남을 이기려는 말이 아니라, 함께 가자고 손을 내미는 말로. 오늘도 저는 제 마음의 문 앞에 작은 문패를 달아둡니다. “기쁜 인사로 들어오세요.” 그 문을 먼저 열고 들어오는 이는 어쩌면 낯선 이일지도, 어쩌면 어제의 나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 문이 열렸다면, 평화는 이미 시작되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