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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빈 여백이 말해준 것: 글을 덜어내는 용기에 대하여

by 현진코코 2025. 9. 18.

글을 덜어내는 용기
글을 덜어내는 용기

말하지 않은 것들이 먼저 도착하는 아침


사진을 고를 때면, 선명한 피사체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피사체를 둘러싼 빈 자리, 빛이 머물다 조용히 물러난 그 공간입니다. 처음에는 그 빈자리가 미완성처럼 보였습니다. 더 채워야 할 것 같고, 뭔가를 놓친 것 같고, 설명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알게 됩니다. 빈자리야말로 장면의 심장이고, 말하지 않은 것이 말한 것을 지탱한다는 것을요.

 

한 장의 사진 앞에서 오래 서 있으면, 침묵이 배경음을 바꿉니다. 가만히 있던 경계선들이 서서히 숨을 쉬고, 빛과 그림자의 완급이 드러나며, 가려진 사연들이 문틈으로 들어옵니다. 그때 저는 비로소, 글도 이렇게 쓰여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말을 더 얹는 대신, 이미 도착해 있는 의미를 더 듣는 쪽으로. 독자가 스스로 다가올 여백을 남겨두는 쪽으로.

 

덜어내는 일은 비움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어떤 호흡으로 남길 것인가. 사진에서 노출을 조절하듯 글에서도 밝기와 대비가 있습니다. 감정을 과하게 끌어올리면 문장은 번쩍거리다가 금세 피로해지고, 설명을 겹겹이 덧칠하면 독자의 시선은 길을 잃습니다. 반대로 한두 군데 밝음을 눌러주고, 서늘한 어둠을 두어 장면의 모서리를 살리면, 독자는 자연스레 그 틈으로 들어옵니다. 덜어냄은 독자를 신뢰하는 기술이기도 합니다. 내 말이 전부가 아니라고 인정하는 태도, 읽는 이의 경험이 빈칸을 채울 수 있다고 믿는 배려. 그 배려가 담긴 문장은 조용히 오래 갑니다.

 

그래서 아침에 글을 시작할 때면 먼저 따뜻한 차를 옆에 두고, 전날 찍어 둔 사진 몇 장을 펼칩니다. 가장 완벽해 보이는 사진이 아니라, 어딘가 허전하고 모자라 보이는 사진을 골라봅니다. 허전함이 말을 겁니다. “여기에 네가 있으면 좋겠어.” 그 속삭임을 따라 첫 문장을 쓰면, 문장은 장식보다 숨을 먼저 고르고, 결론보다 방향을 먼저 정합니다. 덜어냄은 방향을 찾는 일입니다. 덜어낸 만큼 나아갈 길이 보입니다.

 

프레이밍과 여백, 그리고 글의 호흡


프레이밍은 사진의 골격이고, 여백은 사진의 허파입니다. 허파가 있어야 호흡이 이어지듯, 여백이 있어야 장면은 산소를 얻습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 단락과 단락 사이, 설명과 침묵 사이. 눈에 보이지 않는 틈이 독자의 호흡을 지킵니다. 이 틈을 잃으면 글은 밀폐된 방처럼 답답해지고, 좋은 말도 산소 부족으로 쓰러집니다.

 

저는 글을 쓸 때 세 가지 여백을 의식합니다. 첫째, 시간의 여백. 사건을 빠르게 요약하고 결론을 서둘러 내리고 싶은 마음을 다잡고, 장면이 스스로 나타나도록 시간을 둡니다. 이를테면 “슬펐다”라고 쓰기 전에 “종이컵 가장자리에 남아 있던 립스틱 자국이 오후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라고 적어봅니다. 독자가 그 장면에 머물 시간을 벌어주는 여백입니다. 둘째, 감정의 여백. 감정의 이름을 반복하는 대신 감정이 만든 흔적을 남깁니다. “외로움” 대신 “문 손잡이를 세 번째로 확인하고서야 불을 끈 밤” 같은 표현. 감정의 정의를 피하고 감정의 자취를 따라가면, 독자의 마음은 스스로 이름을 붙입니다. 셋째, 설명의 여백. 모든 것을 밝히지 않고, 한두 조각은 독자에게 맡깁니다. 사진에서 일부를 의도적으로 프레임 밖으로 밀어내면, 프레임 안의 사물이 더 깊어지듯이요.

 

이때 중요한 것은 덜어냄과 빈곤함을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덜어냄은 정밀한 선택이고, 빈곤함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선택은 이유를 품고 있고, 준비는 보이지 않아도 힘을 줍니다. 문장을 덜어낼수록 남는 단어의 무게는 더 무거워집니다. 그래서 고르는 단어는 검은 벽돌처럼 단단해야 하고, 어미는 손바닥처럼 따뜻해야 합니다. 단단함은 문장을 세우고, 따뜻함은 독자를 앉힙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서 있을 때, 여백은 공허가 아니라 초대가 됩니다.

 

사진에서 과감히 배경을 날려 피사체를 살리는 기술이 있습니다. 글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주제를 선명히 하려면, 주제와 직접 닿지 않은 장면들을 기꺼이 보내야 합니다. 나에게 아까운 문장일수록 먼저 내보내 보라고, 저는 스스로에게 자주 말합니다. 아까움은 종종 자기애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덜어낼 때의 서늘함을 지나야, 글은 자기중심에서 독자중심으로 이동합니다. 그 이동이 가능할 때, 글은 독자의 삶과 연결됩니다.

 

덜어내는 용기, 남겨두는 책임


덜어내는 일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말로 무장하지 않은 문장은 한동안 벌거벗은 듯 민망하고, 장식이 사라진 단락은 허전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민망함과 허전함이 문장을 단련합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벗듯, 과장된 수식과 설명을 벗겨내면 글의 본래 체형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체형을 사랑하는 일, 그것이 작가에게 필요한 다음 용기입니다.

 

용기만큼 중요한 것이 책임입니다. 덜어낸 뒤 남겨둔 것에 끝까지 책임을 지는 태도. 몇 개의 이미지와 몇 줄의 문장으로도 독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구조를 정갈히 세우고, 리듬을 믿을 수 있게 만들고, 결말을 서두르지 않는 것. 저는 원고를 마무리할 때 이런 점검을 합니다. 첫 문장이 마지막 문장을 예고하고 있는가. 중간의 여백들이 서로를 바라보는가. 덜어낸 설명 대신 배치한 이미지들이 서로 손을 잡고 있는가. 이 물음은 늘 귀찮지만, 이 귀찮음을 통과한 글만이 조용히 오래 남습니다.

 

현실의 작업은 더 구체적입니다. 초고를 쓴 뒤, 문장의 목적어를 줄여 봅니다. “나는 ~을 느꼈다”를 “손끝이 저려왔다”로 바꾸고, “그날은 슬펐다”를 “창문 틈새로 들어온 바람이 커튼을 무겁게 당겼다”로 교체합니다. 동사를 갈고, 형용사를 걷어내고, 부사는 대부분 보내 줍니다. 사진 보정에서 과한 채도와 대비를 낮추듯, 과열된 문장에 물을 식혀 줍니다. 그리고 소리 내어 읽습니다. 호흡이 너무 가쁘면 줄을 바꾸고, 쉼이 길면 문장을 쪼갭니다. 읽히는 리듬이 곧 살아 있는 리듬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백을 독자의 시간으로 남겨둡니다. 글을 다 썼다고 생각하는 순간, 한 번 더 멈춥니다. 결론을 단단히 닫지 않고 살짝 열어 둡니다. 사진에서도 문이 살짝 열린 장면은 오랫동안 마음을 붙잡습니다.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기에, 독자는 자기의 이야기를 들고 그 문턱을 넘어섭니다. 글이 독자의 삶에서 다시 태어나도록 문틈을 남겨두는 일, 저는 그 일을 가장 사랑합니다.

 

어느 날 새벽, 골목 입구에서 가로등이 꺼지고 동쪽이 조금씩 밝아오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사진기를 내리고, 그저 서서 빛이 물러나는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찍지 않았지만, 그 장면은 오래 남았습니다. 찍지 않은 사진처럼, 쓰지 않은 문장도 마음에 남을 수 있다는 것을 그날 배웠습니다. 여백은 부재가 아니라, 다음을 부르는 초대장입니다. 덜어낼수록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조용히 남겨두었을 때만 들리는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 그것이 오늘 내가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내일도 다시, 덜어낼 용기를 준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