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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국토 최남단에서 먹은 짜장면 한 그릇

by 현진코코 2025. 11. 1.

국토 최남단 마라도에 가다
국토 최남단 마라도에 가다

   

   사람은 가끔 ‘끝’을 보고 싶어 한다. 누군가는 산 정상에 올라가며 그것을 확인하고, 누군가는 통장 잔고를 들여다보며(눈물로) 실감한다. 나의 ‘끝 보고 싶다’ 본능은 어느 날, 제주 남쪽 마라도라는 이름으로 향했다. 대한민국 국토의 최남단. 그 끝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을 먹을 수 있을까? (솔직히 두 번째가 더 중요했다.)

 

모슬포항, 바다를 향한 출발

 

 마라도행 여객선은 모슬포항에서 출발한다. 항구 풍경은 늘 분주하다. 여행객들은 배표를 확인하며 부산스럽고, 어민들은 갓 잡은 고기를 정리하느라 바쁘다. 항구 앞 분식집에서는 어묵 국물이 김을 피우며 향기를 흩뿌린다. 그 냄새는 배멀미 걱정보다 강력해서, ‘멀미약 대신 어묵 한 꼬치면 되겠다’는 묘한 확신이 든다.

 

 9월의 바다는 놀라우리만큼 잔잔하다. 파도는 파도라기보다 고양이가 발끝으로 장난치듯 조용하다. 배가 부드럽게 항구를 빠져나가자, 선실의 창가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아이들은 “바다다!” 하고 손가락으로 수평선을 가리키고, 어른들은 “이 정도면 커피 마셔도 안 쏟아지겠네”라며 여유를 즐긴다. 나도 선실 밖으로 나가 바닷바람을 맞았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은 꼭 작은 별들이 바다 위에 흩뿌려진 듯 보였다.

 

국토 최남단에 서다

 

 약 30분 남짓. 마침내 마라도에 닿았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은 ‘국토 최남단’ 표지석을 향해 달려간다. 마치 마라도에 온 이유가 그 돌 앞에서 사진 찍기 위해서인 듯, 셔터 소리가 연달아 울린다. 나 역시 표지석 앞에 서서 한 컷 남겼다. 뒷모습으로 찍었는데, 괜히 바다를 향해 서 있는 내 등이 좀 거창해 보였다.

 

 섬은 작다. 둘레가 약 1.5km 정도라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작은 섬이 전해주는 풍경은 결코 작지 않았다. 섬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다 보면, 남쪽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시원하게 펼쳐진다. 절벽 아래로 파도가 부서지며 뿜어내는 포말은 하얀 꽃잎 같았다. 바람은 거침없지만, 그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와 갈매기 날갯짓이 오히려 섬을 살아 숨 쉬게 한다.

 

마라도의 명물, 짜장면

 

 마라도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짜장면 먹기다. 누군가 섬에 중국집을 열었던 순간부터, 짜장면은 이제 ‘최남단 음식’으로 등극해 버렸다. 그런데 사실 짜장면이 단순히 맛 때문에 유명해진 건 아니다.

 

 10여 년 전, 한 개그맨이 광고 속에서 마라도에 도착하자마자 “짜장면 시키신 분~?” 하고 외치던 장면이 있었다. 작은 섬을 한 바퀴 돌면 금세 만날 수 있다는 설정이었는데, 그 CM이 대히트를 치면서 마라도 = 짜장면이라는 공식이 탄생해버린 것이다. 섬의 자그마함을 강조하려던 유머가, 의도치 않게 짜장면을 ‘국토 최남단의 명품 메뉴’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그 광고 이후로 관광객들은 마라도에 도착하면 거의 자동으로 중국집을 찾아간다. 섬 한가운데서 들려오는 웍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마라도의 종소리처럼 느껴진다. 사실 그 맛은 우리가 익히 아는 짜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광고 속 유머와 ‘끝에서 먹는 한 그릇’이라는 상징이 더해지니, 면발은 단순한 밀가루가 아니라 일종의 의식(儀式)이 된다.

 

 옆자리 아이는 소스에 얼굴을 묻고는 까맣게 수염을 만들어버렸다. 부모는 황급히 휴지로 닦아주었지만, 내 눈에는 그 모습이 오히려 ‘가장 행복한 흑수염 선장’ 같았다. 그 순간, 짜장면은 음식이 아니라 추억이었다.

 

시간을 늘려 얻은 풍경

 

 보통 관광객들은 1시간 반 뒤 돌아오는 배를 타고 섬을 떠난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체류시간을 두 배로 늘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조금 더 천천히 보고 싶어서.”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의 마라도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북적임이 사라진 억새밭은 바람 소리만 남아 고요했고, 바닷가 벤치에 앉으니 갈매기 울음소리가 귓전을 채웠다. 바람에 머리가 엉망이 되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단정해졌다. 특히 해질 무렵의 풍경은 낮과 완전히 달랐다. 해가 기울며 바다는 금빛 띠를 두른 듯 빛났고,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는 낮보다 더 힘차게 흩어졌다. 같은 자리에 서 있었지만, 마치 또 다른 세상을 본 듯했다. “머무름의 깊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마라도에서의 시간은 잔잔했지만, 소소한 해프닝도 있었다. 섬을 걷다가 갈치를 널어놓은 집 앞을 지나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어 말리던 갈치가 마치 손짓하듯 내 얼굴 쪽으로 펄럭였다. 그 순간 나는 “갈치가 나를 부른다”라는 황당한 생각이 들어 괜히 혼자 웃었다.

 

 또 한 번은 목이 말라 가게에서 음료수를 샀는데, 사장님이 “이건 국토 최남단 콜라예요”라며 건네주셨다. 맛은 평범했지만, 그 말 덕분에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음료처럼 느껴졌다. 여행의 재미란 결국 이런 ‘말 한마디의 힘’인지도 모른다.

 

 마라도 여행은 단순히 섬을 보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끝을 경험하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의 최남단에 서니, 방향감각이 새로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북쪽, 동쪽, 서쪽은 늘 당연히 있다고 여겼는데, 남쪽 끝에 서자 ‘아, 내가 여기까지 와 있구나’라는 실감이 뼛속 깊이 전해졌다.

 

 특히 체류시간을 늘린 덕분에 나는 섬의 두 얼굴을 만났다. 낮의 활기찬 마라도와, 해질녘의 고요한 마라도. 대부분은 사진 몇 장 찍고 서둘러 떠나지만, 오래 머물렀기에 섬은 나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결국 여행의 본질은 속도가 아니라 ‘머무름의 깊이’였다. 짜장면 한 그릇도, 바람에 펄럭이던 갈치도, 해질녘의 황금빛 바다도 그 덕분에 훨씬 오래 마음에 남았다.

 

 혹시 제주에서 색다른 하루를 보내고 싶다면, 모슬포항에서 배를 타고 마라도로 가보시라. 국토의 끝자락에서 맞는 바람은 특별하다. 그 바람은 잔뜩 쌓인 일상의 먼지를 털어주고, 다시 시작할 용기를 건네준다. 그리고 최남단의 짜장면은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끝에서 시작을 맛보는 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