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문을 넘자, 시간이 뒤로 물러섰다
한국민속촌의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이상하게도 휴대전화부터 주머니에 넣게 되었다. 굳이 꺼내 들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화면 속 시간이 아니라, 발밑의 시간이 흐른다. 흙길을 밟고, 기와지붕 아래를 지나고, 나무 기둥에 손을 얹는 동안 시계는 제 할 일을 잠시 잊는다.
민속촌은 잘 꾸며진 관광지가 아니라, 시간을 보관해 둔 장소에 가깝다. 전시된 과거가 아니라, 잠시 살아볼 수 있는 과거다. 초가집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지 않는데도, 밥 짓는 냄새가 날 것 같고, 마루에 앉아 있으면 누군가 “어디서 오셨소?” 하고 말을 걸 것만 같다. 그만큼 이곳의 풍경은 현실과 가깝다.
걷다 보니 자연스레 걸음이 느려졌다. 요즘은 어디를 가든 빨리 보고, 빨리 찍고, 빨리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민속촌에서는 빨리 움직이면 손해다. 천천히 걸어야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대문 위의 문살 무늬, 담장 옆에 놓인 항아리의 크기 차이, 집집마다 다른 마루의 높이 같은 것들이다. 그런 사소한 차이가 그 집의 삶을 말해준다.
이 마을에는 엘리베이터도, 자동문도 없다. 대신 문턱이 있다. 그 문턱을 넘을 때마다 나는 괜히 허리를 조금 더 숙이게 된다. 몸이 먼저 예의를 차린다. 오래된 집 앞에서는 사람이 저절로 겸손해진다.
옛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한 발 들어가다
민속촌의 재미는 건물보다 사람에게 있다. 곳곳에서 만나는 재현 배우들은 ‘연기’를 한다기보다 ‘살고’ 있다. 대장간에서는 망치 소리가 리듬처럼 울리고, 초가집 앞에서는 장독대가 햇빛을 받고 있다.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옛사람들의 하루가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바빴는지 짐작이 간다.
그 시절의 삶은 불편했을 것이다. 불을 지피고, 물을 길어 오고, 계절에 따라 옷과 음식을 바꾸는 일은 모두 손이 많이 간다. 하지만 그 불편 속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었다. 해야 할 일이 분명했고, 하루의 끝도 또렷했을 것이다. 요즘처럼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끝은 흐릿한 삶과는 조금 다르다.
민속촌의 부엌을 들여다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밥이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하루의 중심이었겠구나. 밥을 짓기 위해 불을 피우고, 밥이 되기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먹고 나서야 하루가 굴러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너무 쉽게 먹고, 너무 급하게 치운다. 그래서 하루가 어디서 시작됐는지도 모른 채 끝나버리는 건 아닐까.
길을 걷다 마주친 서당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실제 소리는 없는데도, 귀가 기억을 불러낸다. 나 역시 그런 교실에서 자란 세대라서일까. 나무 책상과 먹 냄새, 창호지 사이로 들어오던 햇빛이 겹쳐 보인다. 민속촌은 보는 곳이 아니라, 겹쳐지는 곳이다. 내 기억과 남의 시간이 겹쳐지는 장소다.
돌아보며 배운 느린 삶의 태도
민속촌을 한 바퀴 도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이곳에서는 ‘얼마나 봤는가’보다 ‘어떻게 걸었는가’가 중요해진다. 많이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충분히 남는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요즘 내 삶의 속도를 떠올렸다. 빠르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고, 쉬면 게을러질 것 같아 늘 마음이 바빴다. 그런데 민속촌의 집들은 모두 제자리에서 수백 년을 버텨왔다. 이동하지 않았지만 사라지지 않았고, 유행을 따르지 않았지만 기억 속에 남았다. 그 사실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삶도 꼭 빨라야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제 속도를 지키며 사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다. 민속촌의 길을 걷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런 능력을 연습하고 있었다. 발걸음을 늦추고, 주변을 살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들을 마음속에만 두는 연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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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 다시 아스팔트를 밟았지만, 민속촌에서 배운 태도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문턱을 넘듯 하루의 시작과 끝을 조금 더 의식하게 되었고, 불편함 속에서도 질서를 찾으려는 마음이 생겼다. 한국민속촌은 과거를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현재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곳이었다.
다음에 다시 이곳을 찾게 된다면, 또 다른 계절의 시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면, 이곳이 내게 가르쳐 준 느린 삶의 태도일 것이다. 바쁘게 살지 않아도, 성실하게 살 수 있다는 것. 한국민속촌은 그 사실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알려주는 마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