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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기억의 틈새를 채우는 시간의 결

by 휘준story 2026. 1. 24.

기억의 틈새
기억의 틈새

 

우리는 흔히 인생을 거대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기억하려 애쓴다.

 

졸업, 취업, 결혼, 혹은 예상치 못한 성취나 상실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고, 훗날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가슴 한구석을 뭉클하게 만드는 것은 그런 거창한 이정표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상의 먼지 속에 섞여 있어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는, 아주 사소하고 파편화된 순간들의 집합이다. 나는 오늘 그 잊힌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어 먼지를 털어내 보고자 한다.

 

오전 7시, 창가를 타고 내려오는 희미한 햇살이 방 안의 공기를 가로지른다. 그 빛줄기 속에서 춤추는 미세한 먼지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잠을 깬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시작이지만, 오늘따라 그 정적 속에 섞인 비릿한 새벽 공기가 유독 선명하게 느껴진다. 부엌으로 나가 물을 끓이는 소리, 가스레인지의 불꽃이 ‘틱, 틱’ 소리를 내며 점화되는 순간의 긴장감, 그리고 곧이어 퍼지는 원두의 진한 향기. 이 평범한 행위들이 사실은 얼마나 위태롭고도 소중한 평화 위에 놓여 있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차 한 잔을 들고 베란다로 나서면, 도시의 소음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들린다.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 이웃집의 문 닫히는 소리, 그리고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의 낮은 속삭임. 이 모든 것들은 서로 관계없는 존재들의 아우성 같지만, 사실은 ‘지금 이 순간’이라는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짜 내려가는 씨실과 날실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자신만의 무늬를 그려 넣으며 살아간다.

 

문득 10년 전의 내가 떠오른다.

 

그때의 나는 무엇을 갈망하며 그토록 치열하게 하루를 보냈던가. 기억의 저장고를 뒤져보지만, 당시의 거창한 포부나 목표는 흐릿한 연기처럼 흩어져 있다. 대신 나를 웃음 짓게 하는 것은 뜻밖의 것들이다. 시험이 끝난 뒤 친구와 나누어 먹던 눅눅한 떡볶이의 매콤한 맛, 비 오는 날 버스 창가에 기대어 듣던 노래 가사,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올려다본 주황색 가로등 빛 같은 것들이다.

 

이런 기억들은 논리적인 서사를 갖추고 있지 않다. 그저 감각의 파편으로 남아 우리 뇌리에 박혀 있다. 하지만 그 파편들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들이다. 우리는 성취를 위해 달리는 동안 정작 ‘살아감’ 그 자체를 놓치곤 한다. 미래라는 이름의 저당 잡힌 시간을 살며, 현재라는 이 값진 선물을 너무 쉽게 개봉하지 않은 채 구석에 밀어 넣는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사소함의 가치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길가의 들꽃이 어느 날 갑자기 경이롭게 다가오고, 매일 먹는 밥상 위의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서 형언할 수 없는 위안을 얻는다. 타인의 무심한 친절 한 마디가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첫 찬바람에 코끝이 찡해지는 경험. 이것은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삶에 대한 경건함이다.

 

우리는 늘 무언가가 결핍되었다고 느낀다.

 

더 좋은 차, 더 넓은 집, 더 높은 사회적 지위가 행복의 절대적 조건인 양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하지만 진정한 풍요는 소유의 양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많은 '순간'을 온전히 소유했느냐에 달려 있다. 퇴근길, 지친 몸을 이끌고 지하철 역을 나설 때 코끝을 간지럽히는 갓 구운 빵 냄새를 맡으며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삶의 품격이다.

 

가끔은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오늘 하루, 너는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을 발견했니?"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더 세밀하게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길 고양이가 햇볕 아래서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는 모습, 버스 옆자리에 앉은 노부부가 가만히 맞잡은 두 손의 주름, 해 질 녘 노을이 빌딩 숲을 금빛으로 물들이는 찰나의 장관. 이런 장면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최고의 예술 작품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 또한 그 틈새를 메우는 작업이다. 먼지처럼 사라질 순간들을 단어라는 그릇에 담아 박제하는 일. 비록 내 글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거창한 담론이 아닐지라도, 누군가 이 글을 읽으며 자신의 잊혀진 기억 한 조각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이라는 대서사시를 써 내려가는 작가들이다. 그리고 그 소설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대개 아주 작은 쉼표와 평범한 단어들 사이에서 탄생한다.

 

인생은 짧고, 우리는 모두 끝을 향해 걸어가는 여행자다. 여행의 끝에서 우리 손에 쥐여 있을 것은 화려한 훈장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온 길 위에 떨어뜨린 소박한 웃음과 눈물,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걸어준 사람들의 온기일 것이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조용히 눈을 감고 오늘 하루의 틈새들을 복기해 본다. 출근길에 마주친 이름 모를 아이의 웃음, 점심시간에 마셨던 시원한 물 한 잔의 감촉, 퇴근 후 가족과 나누었던 시시콜콜한 농담들. 그 조각들이 모여 나의 하루를 완성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예민하게, 조금 더 다정하게 세상의 사소함들을 맞이하겠노라 다짐한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지만, 우리가 부여잡은 이 찰나의 순간들은 영원 속에 각인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평범한 비범함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삶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거창한 파도가 아니라, 발목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소소한 물결임을 잊지 말자. 그 물결들이 모여 마침내 우리를 깊고 푸른 평온의 세계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의 틈새를 채우는 것은 대단한 성취가 아니라,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그 사랑이 있는 한, 우리의 인생은 결코 공허하지 않을 것이다. 하루를 접는 시간 긴 고백을 마치며, 나는 다시 한번 창밖의 어둠 속에 빛나는 작은 별들을 바라본다. 저 별들처럼, 우리의 사소한 일상도 누군가에게는 길을 비추는 희망의 빛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