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9

바람의 혀와 돌담의 귀, 제주의 숨결을 걷다 제주라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푸른 바다, 솟아오른 한라산, 그리고 우뚝 선 돌하르방. 그러나 이 익숙한 풍경 뒤편, 혹은 그 익숙함 속 깊숙이 숨어있는 제주의 진짜 심장 박동을 느끼고 싶다면, 관광객의 북적거림을 잠시 뒤로하고 투박하게 쌓아 올린 검은 돌담이 끝없이 이어지는 옛길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제주의 진정한 이야기는 시끌벅적한 관광지 대신, 이곳 돌담 사이를 휘감아 도는 바람의 속삭임과, 그 바람의 모든 것을 묵묵히 들어준 돌담의 귀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돌담길은 마치 시간의 터널과 같아서,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수백 년 제주의 삶과 지혜가 바람처럼, 혹은 돌멩이처럼 단단하게 다가온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관광객이 아닌 여행자가 된다. 바람의 혀, 제주의 .. 2025. 11. 5.
국토 최남단에서 먹은 짜장면 한 그릇 사람은 가끔 ‘끝’을 보고 싶어 한다. 누군가는 산 정상에 올라가며 그것을 확인하고, 누군가는 통장 잔고를 들여다보며(눈물로) 실감한다. 나의 ‘끝 보고 싶다’ 본능은 어느 날, 제주 남쪽 마라도라는 이름으로 향했다. 대한민국 국토의 최남단. 그 끝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을 먹을 수 있을까? (솔직히 두 번째가 더 중요했다.) 모슬포항, 바다를 향한 출발  마라도행 여객선은 모슬포항에서 출발한다. 항구 풍경은 늘 분주하다. 여행객들은 배표를 확인하며 부산스럽고, 어민들은 갓 잡은 고기를 정리하느라 바쁘다. 항구 앞 분식집에서는 어묵 국물이 김을 피우며 향기를 흩뿌린다. 그 냄새는 배멀미 걱정보다 강력해서, ‘멀미약 대신 어묵 한 꼬치면 되겠다’는 묘한 확신이 든다.  9월의 바다는 놀라우.. 2025. 11. 1.
설악의 척추를 걷다 : 오색에서 대청봉을 거쳐 백담사까지 오색의 새벽, 산의 문을 열다새벽 3시 정각, 남설악 탐방지원센터 앞. 이후마 사진은 카메라 조작 실수로 망침별빛이 머리 위에서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 세상은 잠들어 있었지만, 산은 이미 숨을 쉬고 있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몇몇 헤드랜턴 불빛이 계곡 사이를 오르내렸다. “오늘은 대청봉까지 간다.”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가쁜 숨을 고르고, 첫 발을 내디뎠다.오색 코스의 초입은 부드럽지만, 곧이어 돌계단이 이어지며 기세를 올린다. 한걸음마다 산의 무게가 실린다. 새벽 공기가 차가워 장갑 안 손끝이 시렸고, 헤드랜턴 불빛 속에서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자 이마의 땀이 식으며 식은땀으로 변했다.새벽 5시를 넘기자 동쪽 하늘이 조금씩 붉게 물들었다. 나무 사이로 여명이 스며들며 세상이.. 2025. 10. 13.
공룡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길 – 상족암군립공원 탐방기 바닷가 절벽에 새겨진 거대한 시간의 흔적 경남 고성에 자리한 상족암군립공원은 이름부터가 조금 낯설다. 처음 이곳을 들었을 때만 해도 “암”이라는 글자에 단순한 바위산을 떠올렸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그 풍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바닷가 절벽에 드러난 바위들이 층층이 겹쳐 있으며, 파도와 바람에 깎여 형성된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지질학 교과서였다. 특히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모습은 자연의 조각 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공원 입구에서부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넓은 주차장과 깔끔하게 정비된 탐방 안내판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이끄는 대로 바닷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바위 절벽 아래로 이어진 길 위에서 특별한 흔적이 나타났다. 바로 공룡 발자국 화석이다. 언뜻 보면 그냥 움푹 패인 돌.. 2025. 10. 3.
실패한 축제의 뒷이야기 성공담 뒤에 가려진 또 다른 기록 축제는 왜 늘 성공해야만 하는가그러나 실패한 축제의 이야기를 돌아보는 것은 중요하다. 실패의 기록은 단순히 부끄러운 과거가 아니라, 더 나은 행사를 만들기 위한 소중한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의 참여 부족, 과도한 예산 집행, 무리한 기획, 날씨와 같은 변수를 간과한 준비 부족 등, 실패의 원인은 다양하다. 그 속에는 우리 사회가 축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또 어떤 점을 간과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성공만을 이야기하는 사회에서는 배움이 제한된다. 반대로 실패를 솔직히 기록하고 분석할 때, 비로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에 실패한 축제의 뒷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우리가 흔히 접.. 2025. 9. 27.
AI 시대, 사람만 할 수 있는 일들 기술 발전 속에서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찾다 너무 빨라진 세상, 그 속에서 던져지는 질문 우리는 지금,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속도로 기술이 발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특히 AI의 등장은 우리의 일상 전반을 바꿔놓았다. 글을 쓰는 일, 사진을 보정하는 일,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 심지어 음악을 작곡하고 그림을 그리는 일까지 이제는 기계가 해내고 있다. 과거에는 인간만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부분까지 기술이 발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앞으로 인간이 꼭 해야만 하는 일은 무엇일까?" 기술의 편리함은 분명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작은 불안감도 스며든다. 기계가 글을 쓰고, 디자인을 하고, 계산과 분석까지 대신해주는 세상에서 .. 2025. 9.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