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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혀와 돌담의 귀, 제주의 숨결을 걷다 제주라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푸른 바다, 솟아오른 한라산, 그리고 우뚝 선 돌하르방. 그러나 이 익숙한 풍경 뒤편, 혹은 그 익숙함 속 깊숙이 숨어있는 제주의 진짜 심장 박동을 느끼고 싶다면, 관광객의 북적거림을 잠시 뒤로하고 투박하게 쌓아 올린 검은 돌담이 끝없이 이어지는 옛길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제주의 진정한 이야기는 시끌벅적한 관광지 대신, 이곳 돌담 사이를 휘감아 도는 바람의 속삭임과, 그 바람의 모든 것을 묵묵히 들어준 돌담의 귀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돌담길은 마치 시간의 터널과 같아서,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수백 년 제주의 삶과 지혜가 바람처럼, 혹은 돌멩이처럼 단단하게 다가온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관광객이 아닌 여행자가 된다. 바람의 혀, 제주의 .. 2025. 11. 5.
국토 최남단에서 먹은 짜장면 한 그릇 사람은 가끔 ‘끝’을 보고 싶어 한다. 누군가는 산 정상에 올라가며 그것을 확인하고, 누군가는 통장 잔고를 들여다보며(눈물로) 실감한다. 나의 ‘끝 보고 싶다’ 본능은 어느 날, 제주 남쪽 마라도라는 이름으로 향했다. 대한민국 국토의 최남단. 그 끝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을 먹을 수 있을까? (솔직히 두 번째가 더 중요했다.) 모슬포항, 바다를 향한 출발  마라도행 여객선은 모슬포항에서 출발한다. 항구 풍경은 늘 분주하다. 여행객들은 배표를 확인하며 부산스럽고, 어민들은 갓 잡은 고기를 정리하느라 바쁘다. 항구 앞 분식집에서는 어묵 국물이 김을 피우며 향기를 흩뿌린다. 그 냄새는 배멀미 걱정보다 강력해서, ‘멀미약 대신 어묵 한 꼬치면 되겠다’는 묘한 확신이 든다.  9월의 바다는 놀라우.. 2025. 11. 1.
고성 왕곡마을 탐방기 동해의 바람이 불어오는 길목에서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의 왕곡마을은 동해의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길목에 자리한, 우리 전통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차로 해안선을 따라 달리다 보면 푸른 바다와 맞닿은 길 끝에 ‘왕곡마을’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 순간부터 마치 시간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듯한 기분이 든다. 왕곡마을의 기원은 고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조선 후기 전란과 화재를 피해 이주한 이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면서 본격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갖추었다. 특히 함경도에서 내려온 이주민들이 많았는데, 이로 인해 마을의 언어, 풍습, 건축 양식에 이북의 색채가 짙게 스며들었다. 그래서 왕곡마을은 단순히 강원도의 한 고장이 아니라, 이북 문화가 남하해 정착한 독특한 ‘문화 교차점’으로 .. 2025. 10. 26.
청주 상당산성 탐방기 – 돌길에 새겨진 시간의 숨결 산길이 부른 아침, 첫걸음을 떼다청주에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행운이다. 도시 한복판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오랜 세월을 품은 산성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상당산성은 그중에서도 내 마음을 자주 불러내는 곳이다. 산성의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단순히 운동 삼아 나온 산책객의 발걸음을 넘어, 역사의 한 장면을 밟고 있다는 묘한 기분이 든다.이른 아침, 아직 도시의 소음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 발걸음을 옮겼다. 초입에 들어서자 가을 햇살이 솔잎 사이로 가볍게 쏟아졌다. 솔향에 섞여 온도 낮은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이 길은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다. 1천 년도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이들이 오르내렸고, 그들의 이야기가 발자국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 길이다. 한양을 지키던 남한산성에 비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2025. 10. 22.
설악의 척추를 걷다 : 오색에서 대청봉을 거쳐 백담사까지 오색의 새벽, 산의 문을 열다새벽 3시 정각, 남설악 탐방지원센터 앞. 이후마 사진은 카메라 조작 실수로 망침별빛이 머리 위에서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 세상은 잠들어 있었지만, 산은 이미 숨을 쉬고 있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몇몇 헤드랜턴 불빛이 계곡 사이를 오르내렸다. “오늘은 대청봉까지 간다.”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가쁜 숨을 고르고, 첫 발을 내디뎠다.오색 코스의 초입은 부드럽지만, 곧이어 돌계단이 이어지며 기세를 올린다. 한걸음마다 산의 무게가 실린다. 새벽 공기가 차가워 장갑 안 손끝이 시렸고, 헤드랜턴 불빛 속에서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자 이마의 땀이 식으며 식은땀으로 변했다.새벽 5시를 넘기자 동쪽 하늘이 조금씩 붉게 물들었다. 나무 사이로 여명이 스며들며 세상이.. 2025. 10. 13.
공룡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길 – 상족암군립공원 탐방기 바닷가 절벽에 새겨진 거대한 시간의 흔적 경남 고성에 자리한 상족암군립공원은 이름부터가 조금 낯설다. 처음 이곳을 들었을 때만 해도 “암”이라는 글자에 단순한 바위산을 떠올렸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그 풍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바닷가 절벽에 드러난 바위들이 층층이 겹쳐 있으며, 파도와 바람에 깎여 형성된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지질학 교과서였다. 특히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모습은 자연의 조각 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공원 입구에서부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넓은 주차장과 깔끔하게 정비된 탐방 안내판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이끄는 대로 바닷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바위 절벽 아래로 이어진 길 위에서 특별한 흔적이 나타났다. 바로 공룡 발자국 화석이다. 언뜻 보면 그냥 움푹 패인 돌.. 2025. 10. 3.